얼마 전 KBS1 TV에서 본 다큐멘터리 한 편이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며칠이 지냈는데도 이따금씩 떠오른다. 평소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던 터라 잔상이 남는가보다. 제목은 ‘고양이들의 아파트’. ‘고양이를 부탁해’를 연출한 정재은 감독이 2020년에 만든 작품이다.

재개발을 앞둔 대규모 아파트 단지 내에 사는 고양이들을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담았다. 아직 이주하지 않은 주민과 동물권단체 활동가, 캣맘 그리고 재개발 예정지에 사는 300여 마리의 고양이가 등장 인물과 동물이다.

사람들이 사는 곳, 도시든 농산어촌이든 그곳엔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다. 풀과 나무도 공간의 주인공이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되게끔 해준다.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된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도 사람들만 살았던 게 아니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 그대로 고양이들의 아파트였던 것이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은 다른 존재들의 있음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다’는 연기론을 펼쳤던 것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물리학자 장회익은 개개의 생명을 낱생명이라 했으며, 낱생명이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를 보생명이라 했다. 낱생명과 보생명은 서로 의존하므로 비로소 온생명이라고 했다.

고양이들은 영역동물이어서 재개발을 한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 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욕망을 채우는 기회가 되기에 반기지만, 고양이들에게는 삶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몸을 숨길 곳이 없어진다. 고양이들의 삶의 기본조건인 식주(食住)의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양이들을 살리기 위해 입양, 이주 등의 방법을 찾아냈다. 입양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서 버려져 길고양이 생활을 했으니 사람에게 친화적이지 않다. 그러니 입양이 쉽지 않았다. 두 번째 방법은 인근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포획도 어렵거니와 그렇게 옮겨놔도 고양이들은 본성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큐멘터리는 그런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고양이는 번식력이 무척 왕성하다.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임신 가능하다. 임신기간은 두 달쯤이며, 보통 4~8마리를 출산한다. 출산 후 두 달의 수유기간이 지나면 다시 임신할 수 있다. 암고양이 한 마리가 1년에 세 번, 12~24마리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니, 개체 증가속도가 기하급수적이다.

고양이가 사람들의 곁에 산 것은 1만 년 전쯤이라고 한다. 참으로 오랜 인연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저장한 곡식을 지키기 위해 고양이를 불러들였다. 고양이는 사람들로부터 먹을 것을 얻었으며, 고양이는 쥐를 잡아 식량을 지켜주었다.

고양이들은 사람과 공생의 관계를 맺으면서 야생성을 일부 버렸다. 잡식을 하는 식습관으로 변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전히 야생성을 유지하며 육식을 하는 것들에 비해 소화기관이 길다. 야생 고양이의 털 색깔을 짙은 갈색인데, 집고양이는 보호색을 버리고 여러 색깔로 변화했다.

고양이는 옛 그림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장수를 의미했다. 선비들의 공부방에 고양이 그림을 걸어두는 풍습도 있었는데, 서책을 갉아먹거나 찍찍 울어대는 쥐의 천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숙종 임금은 굶주리는 고양이를 데려와 금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보살폈다고 한다.

동물에 대해 반려라는 말을 붙이려면 그 동물의 본성을 배려해야 한다. 또 동물 개체마다의 성격을 발산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고양이는 아기가 아닌 만큼 고양이로 대해야 한다. 고양이를 입양하는 것은 고양이의 생에 끼어든 것이다. 그만큼 책임도 따른다. 그렇지 않으면 애완이라고 불러야 솔직하다. 버려진 고양이는 애완에도 이르지 못했다.

‘고양이들의 아파트’의 마지막 장면은 철거를 끝낸 아파트 단지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이다. 그 많던 고양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가 그들의 삶터였는데.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