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나는 고향집에 다녀왔다. 어릴 적 외가에 의탁했던 터라 나는 외가를 고향집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마음이 몹시 울울할 때면 고향집을 찾는 이유는 고향집 앞에 너른 금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강가에 나가서 굽이치면서 흐르는 탁류를 보자 미당 서정주의 ‘신발’이 떠올랐다.

“내 신발을 나는 먼 바다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장난하고 놀다가 그만 떠내려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내 이 신발은 벌써 변산 콧등 밑의 개 안을 벗어나서 이 세상의 온갖 바닷가를 내 대신 굽이치며 놀아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해 여름, 외조모는 장에 나갔다가 내 고무신을 사갖고 오셨다. 그 고무신은 친구들의 것과 달리 하얀색이었다. 강변 마을이었던 터라 때가 탈 것을 고려해 마을 사람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검은색 고무신을 신었다. 나만 하얀색 고무신을 신었던 터라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산으로 강으로 온종일 쏘다니다가 집집마다 굴뚝에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면 나는 친구들과 함께 강가에 가서 고무신을 씻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들고 있던 고무신을 놓쳐서 잃어버렸다. 이튿날 눈뜨자마자 나는 고무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강변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무신은 보이지 않았고, 고무신을 삼킨 탁류만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고무신은 강경을 거쳐서 군산 하구로 굽이치는 물결을 따라 흘러갔을 것이다.

미당 서정주가 ‘신발’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진아(眞我)로서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남아 있는 잃어버린 신발과 가아(假我)로서 새 신발을 신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 본향(本鄕)의 노스탤지어를 노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270㎜ 크기의 검정색 금강 구두를 신은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오래 전 잃어버린 손바닥 크기의 하얀색 고무신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고무신과 함께 잃어버린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탁류에 비친 내 모습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고, 진각(眞覺) 혜심(慧心) 선사의 선시가 혀끝에 맴돌았다.

池邊獨自座 못가에 홀로 앉아
地底偶逢僧 물 밑의 그대를 우연히 만나
默默笑相視 묵묵히 웃음으로 서로 바라볼 뿐
知君語不應 그대를 안다고 말하지 않네.

-소설가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