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전쟁이 터졌으니 10개월째다. 날마다 전쟁 관련 뉴스가 전해진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죽음과 파괴 속에서 지옥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러시아정교회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의 발언이다.

키릴 총대주교는 9월 25일 예배 시간에 “병역 의무를 수행하다 죽는 것은,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며 “이 희생을 통해 자신의 모든 죄는 씻긴다”라고 말했다. 푸틴의 예비군 동원령을 두둔한 것이다. 러시아의 1억5천만 인구 중 1억 명이 러시아정교회의 신자일 만큼 그의 영향력이 크다. 러시아의 수많은 젊은이가 푸틴의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조국을 탈출하는 중에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일본 선불교의 논리를 그대로 옮긴 발언을 했으니, 그가 종교인인지 의심스럽다.

일본의 불교는 2차대전 중 젊은이들에게 전쟁 참여를 독려하면서 선불교의 논리를 악용했다. 선불교를 미국에 전해 유명해진 스즈키 다이세쓰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극기적인 선 수업의 계율적인 경향은 전투 정신과 일치한다. 전투하는 이는 언제나 싸움의 대상에 마음을 오롯이 쏟으며, 곁눈질해서는 안 되고 적을 부수기 위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부추겼다.

인류는 늘 전쟁의 시기를 살았다. 지난 5천 년 동안 1만4천 건의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 전쟁의 횟수는 더 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40년 동안에도 150건의 전쟁이 터졌고, 2천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역사는 그야말로 피와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본성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라는 논리가 되어 전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폭력성과 공격성이 있지만, 전쟁이 인간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전쟁은 정치, 사회, 문화 등에 걸친 다양한 원인이 얽혀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세비야 선언’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있다. “전쟁이나 여타 폭력적 행위가 유전적으로 우리의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공격을 받으면 공포와 증오, 복수심이 생긴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지만, 상황이 늘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들과 제3자의 화해의 노력이 뒤따른다면 ‘이에는 이’ 식의 대립에 이르지 않는다. 평화와 화해, 협력, 조화의 문화의 정도에 따라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고조시키면 싸움과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특히 국가 간에는 애국심 이데올로기가 동원되면, 또는 ‘이번에 본때를 보여주어 다시는 넘볼 수 없게 하자’는 심리를 자극하면 막다른 골목을 향하게 된다.

세비야 선언문은 평화의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전쟁이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하듯이 평화 역시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한다. 전쟁을 창안한 바로 그 종이 평화도 고안할 수 있다.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 있다.”

두 장면 중 다른 하나는 항복한 러시아 군인에게 따뜻한 차와 빵을 먹이면서 전화기를 건네 고향의 어머니와 통화하게 하는 모습이다.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보여준다. 어떤 마음이 저리 따뜻하게 했을까. 차와 전화기를 건넨 우크라이나 여성은 러시아 군인을 침략군으로 보기보다는 한 인간으로 보았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러시아 국가조직에 의해 동원되어 전쟁터로 떠밀린, 우크라이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스무 살 남짓의 청년.

러시아정교회의 수장인 키릴과 우크라이나 여성 중 누가 더 인간적이고 종교적이고 거룩한가. 역사 속에서 종교인들은 전쟁과 같은 악을 종교의 이름으로 부추기는 반종교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종교는 그 이름만으로 거룩해지지 않는다. 연민의 마음을 잃어버린 종교는 종교의 탈을 쓴 악이 된다. 키릴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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