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잠 선사, ‘매화를 찾아’, ‘선정에 들어’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보위에 오른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유서를 모두 불태운 뒤,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명을 ‘높고 눈 덮인 산’이라는 의미의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이후 그는 전국을 유랑하고 은거하면서 잘못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그것을 선심(禪心)으로 표출하였다.

시구는 언제나 한가로움 속에서 얻고 詩句每因閑裏得
선심은 거의 다 고요함 속에서 끌리네. 禪心多向靜中牽
청산은 억지로 어리석은 이를 보고 웃고 靑山强對癡然笑
명월은 누가 나누어 작은 샘에 떨어졌나 明月誰分落小泉

시심과 선심은 한가롭고 고요한 속에서 얻어 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청산은 항상 여전히 말없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기에 억지로 어리석은 자를 보고 웃을 뿐이다. 밝은 달을 누군가가 나누어 작은 우물에 떨어뜨린 것으로 보고 있는 설잠에게 시와 자연은 또 다른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자신의 호를 ‘매월당’이라고 했던 설잠에게 매화와 달은 중요한 시적 소재였다. 실로, 그에게 달빛이 없는 매화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매화는 어린 시절 그 자신이 추구했던 현실이었고, 달빛은 매화를 한층 고상하게 만드는 일종의 빛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는 탐매행(探梅行)을 즐겨하고 많은 탐매 시를 지었다.

눈길로 그대 찾아 홀로 지팡이 끌고 가니 雪路尋君獨杖藜
그 속의 참된 뜻 있어 깨달았다 도로 매혹되네 箇中眞趣悟還迷
유심이 도리어 무심의 부림을 당하여 有心却被無心事
세 별 지고 달이 질 때 까지 배회하였네. 直到參橫月在西

눈 덮인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일은 매화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설잠의 심경이다. 매화를 찾아 나선 설잠은 자신을 유심(有心)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마음속에 근심이 꽉 찬 상황을 그렇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비해 매화는 무심(無心)의 존재,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화자는 그 무심한 존재(매화)에게 부림을 당하여 저녁별이 지고 서녘에 달이 질 때 까지 배회하고 말았다.

설잠은 자신의 방랑을 스스로 ‘탕유(蕩遊)’라고 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자신의 본래성을 찾는 고독한 방랑길이었다. 설잠이 운수행각을 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는 대로 시를 읊고 구경도 하고자 했던 것은, 현실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금오산 용장사에 머문 지 1년쯤 되는 어느 날, 선정에 드는 모습에서 잘 표출되고 있다.

창에 가득 비친 붉은 햇살 사람마음 허락하니 滿窓紅日可人心
방장의 유마 거사 도력이 심오하구나 方丈維摩道力深
말하지 않고 옷깃 여며 엄히 꿇어앉는데 不語正襟危坐處
뜰에 가득한 솔 소리 이것이 진정한 벗이라네 一庭松聲是知音

유마거사의 ‘침묵’의 고사를 인용하여 깨달음을 ‘솔 소리’에 의탁하여 지은 백미의 시이다. 창에 가득 비친 붉은 해를 바라보고 마음의 평상심을 느낀 화자가 ‘유마거사의 도력이 심오하다’고 한 것은 유마거사가 수보리존자의 물음에 ‘침묵’한 것이 천둥보다 큰 울림이었다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의 고사를 말하고 있다. 또한 ‘말하지 않고 옷깃 여미어 꿇어앉는다’는 것은 무설설(無說說)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정에 들어 있던 중 불어오는 ‘솔 소리’를 벗이라고 여기는 것은 성률도 없는 무생곡(無生曲)을 듣는 세외지심(世外之心)의 깊은 선심을 담아내고 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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