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처음 불교를 접한 건 어릴 적 어머니 어깨 너머로였다. 그 덕에 나이 들면서 대ㆍ소승경전 등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책을 꽤 섭렵했다. 하지만, 그렇게 불법(佛法)을 섭렵했다고 해서 마음의 '뾰쪽함'마저 완전히 떨칠 순 없었다. 그 뽀쪽함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던 건 몇 십년 전, 어느 가을날 한 비구니 스님을 통해서였다.

마침 고향을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목포행 기차를 탔다. 그런데 옆자리에 비구니 스님이 앉아 계셨다. 60대 초로의 스님이었다. 늦가을 햇살이 스님의 어깨를 지나 필자의 가슴께로 빛쳐 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생각으로 곧,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철커덩철커덩, 한참을 열차가 달려가고 있는데, 비구니 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거사님은 뭐하고 사세요?"
"저 말인가요?"
"소승 옆에 거사님 말고 또 누가 계신가요."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말이 풀리기 시작하자 필자는 비구니 스님에게 뾰쪽한 마음을 물었다.
"스님, 마음이 잘 비워지든가요. 저는 그게 잘 안 돼 미치겠어요"
"(.....)"
"얼마 전에 한눈 팔다 몸을 크게 다쳤거든요."
"어디를요?"
비구니 스님이 말했다.
"머리 속인 것도 같고 마음속인 것도 같고 두 군데 다인 것도 같고......"
"옹이 없고 나이테 없는 나무 속살은 없는 법이지요. 그런데 거사님도 이쪽 담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 같네요."

사실이었다. 불교는 어머니의 부적이었다. 필자가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집 안방 문갑 위에 주먹만한 불상 하나를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끼니때마다 그 앞에 밥과 국을 놓아두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필자는 배가 너무 고파 그 밥과 국을 다 먹어버렸다. 그때처럼 어머니가 화내신 적은 없었다.
"니가 밥허고 국허고 다 먹었지야!"
"예, 어무이. 배가 너무 고파서요."
"이 놈의 새끼, 배가 아무리 고프기로 집에 못오는 니 큰 성(형) 만큼 하겠냐. 저렇게 밥그릇과 국그릇이 비어 있으면 부처님 가피를 어떻게 입것냐."

그랬다. 어머니는 행방불명된 지 20년이 넘은 큰형을 매일 같이 기다리고 계셨던 거다. 그것도 부처님 앞에 매일 끼니때마다 새밥과 새국을 올려놓으면서, 어디서든, 큰아들이 살아 배 곪지 않기를 바라고 비셨던 거다.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의 해원(解願) 의식이기도 했고, 큰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은 마음이기도 하셨을 것이다.

사실, 어머니는 시대의 비극 속에서 어이없는 가문의 몰락과 혈육들의 처참한 손상 등을 겪으면서 무너져 내린 속마음을 주먹만한 불상에 기대 버텨 오셨던 거다.

어머니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큰형은 아직까지 돌아오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같은 어머니의 정성과 신앙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되었고, 그것이 힘든 한 세상을 당신 나름대로 버텨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이 되자 조그만 불상 앞에 날마다 끼니때마다 새밥과 새국을 떠다 놓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도 하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아직까지도 큰형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쩜 큰형은 돌아가셨을 지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돌아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필자의 마음속에선 영원히 살아 계신다.

왜일까? 그날 서울에서 목포까지 동행한 비구니 스님과의 대화 덕분에 필자의 뾰쪽한 마음은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불교공부와 동양철학에 더 매진하기 시작했다. 비구니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가신 말씀은 오늘도 뾰쪽해지려는 필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다듬어주고 있다.

"거사님의 말씀 속에 어머니께서는 이미 답을 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큰형은 비록 못 오셨지만, 대신에 거사님이 살아 계시잖아요.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게. 어머니는 '사람의 도리'를 실천한 것이지 부처님께 '내 것'을 주시라고 조른 것이 아니거든요."

저물어가는 한해의 끝에서 필자는 문득 어머니와 나와 불교를 떠올려본다. 어머니가 모셨던 그 조그만 불상은 이제 필자의 삶을 버텨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있다. 어머니와 그 작은 불상과 우연히 만났던 그 비구니 스님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철학박사ㆍ한국육임학회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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