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마른 잎을 부는 바람에 날려 보낸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내는 엽서 같다. 그 엽서들은 바람을 타고 곳곳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그 엽서를 받고서 엽서에 적힌 메시지를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마른 잎은 바닥에 뒹굴다가 다른 마른 잎들과 함께 수북하게 쌓인다. 길에 쌓인 낙엽들을 밟으면 그 나뭇잎들이 나뭇가지에서 피어나서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기까지의 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를테면, 봄볕을 받으며 하늘하늘 날아가는 나비 떼나 신록의 산그늘에서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이라든지, 무더운 여름날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는 구름이나 소나기가 내린 뒤 더 극성스러워진 매미 울음소리라든지, 짙푸른 하늘 때문에 더욱 붉게 보이는 고추밭이나 가을 무서리의 쓸쓸함을 알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라든지…….

도종환 시인의 ‘낙엽’에는 “허공에 찍었던 발자국 가져가는 새처럼 강물에 담았던 그림자 가져가는 달빛처럼 흔적 없이 헤어지자”라는 구절이 있다. 실로 명창이다. 1년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로 이뤄진다면, 인생은 생로병사 사고(四苦)로 이뤄져 있다. 봄이 있기에 가을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계는 다시 순환한다. 미당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어난 것은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기 때문이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기 때문이고 밤에는 무서리가 내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태어났기에 늙는 것이고, 늙기에 병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죽음에 기대고, 죽음은 삶에 기대어 순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테베에 있는 높은 바위산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있었다. 스핑크스는 여자의 머리, 사자의 몸, 새의 날개, 뱀의 꼬리를 지니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바위산을 지나가는 행인이 있으면 반드시 수수께끼를 냈고,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행인을 잡아먹었다. 그 수수께끼인즉슨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 다리, 두 다리, 세 다리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이 수수께끼를 푼 것은 오이디푸스이다. 해답인즉슨 인간이다. 어렸을 때는 네 발로 기고, 어른이 되면 두 발로 걷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의 진정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스핑크스가 물은 것은 ‘너는 누구냐?’, 즉 존재론적 화두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걷다가 늙어서 지팡이를 짚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고 저녁이면 해가 진다. 하루는 그렇게 간다. 보름달이 점점 야위어 그믐달이 된다. 한 달은 그렇게 간다. 봄이면 신록이 돋고 가을이면 낙엽이 진다. 한 해는 그렇게 간다. 아이는 자라서 노인이 된다. 인생은 그렇게 간다.

정현종 시인이 ‘낙엽’에서 “의도한 듯이 길들을 지운 낙엽이여. 길을 잘 보여주는 구나. 마침내 네가 길이로구나.”라고 노래했다. 길을 지움으로써 새로이 길을 여는 낙엽에게서 우리는 인생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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