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한국 차도계의 거목 채원화 원장을 만나다 ②

다솔사는 소설 ‘등신불’ 탄생지

효당 차살림 신조는 ‘다도무문’

효당은 원효를 성인으로 추앙

효당의 맏제자로 ‘원화’ 호 받아

순천 선암사 뒤뜰 차밭1.
순천 선암사 뒤뜰 차밭1.

 

다솔사 최범술(崔凡述) 스님을 존경하는 차인들이 참 많다. 그러나 효당 선생을 처음 본 사람들 가운데는 남루한 양복과 땅딸보 대머리 행색으로 무섭게 보는 이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효당 최범술의 이름을 모르는 차인도 있다. 하지만, 효당은 진주 아니 우리나라 차계를 대표하는 큰 인물로 차계(茶界)의 종장(宗匠)이나 중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다. 차계에서 전라도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경상도 봉명산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이 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초의 스님의 《동다송》 이래로 근세 한국 최고의 차 이론서인 효당 스님 저술인 《한국의 차도》를 비롯하여 ‘차인회’ 등의 역사를 보면 차계에 끼친 영향은 제일 컸다고 할 수 있다.

차계 이외에도,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효당 선생은 선지식이다. 선다일미(禪茶一味)의 그 맛을 아는 ‘깨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불교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지식 성철 큰스님이 효당 스님을 만난 계기로 출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만해 한용운과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선지식과 문인들 등 일제강점기의 지식층이 모여서 담론을 나눈 곳이 바로 다솔사이다. 영남 제일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김범부는 《화랑외사》를 쓴 인물로, 《환단고기》를 쓴 이유립의 후원자이며 경주 3대 천재로 알려진 사람이다. 여하튼 그 동생인 김동리는 다솔사에서 귀동냥을 하다가 중국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를 담은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썼다. 여하튼 당시의 지식층이 모여서 독립과 우리 전통문화를 넘어 신지식을 이야기했던 곳이 다솔사였다는 점은 당시 지식층의 정점에 효당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솔사 풍수는 장군대좌형이라고 한다. 절 주변의 소나무도 마치 살아있는 듯이 씩씩하고,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바나나나무 즉 파초가 어울리게 자라난 곳이다. 적멸보궁 주변으로 봉일암까지의 차밭은 효당과 채원화 원장이 반야로(般若露) 차를 만들었던 곳이다. 만당회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스승 만해와 제자 효당이 자주 찾아갔던 일본 국보 찻잔 ‘이도다완’(井戶茶碗)의 고향으로 알려진 진교 백련리(白蓮里) 역시 다솔사에서는 직선거리로 10여km에 불과하니, 다솔사는 풍수로도 독립운동으로도 차도로도 그리고 차도구로도 그 입지가 매우 훌륭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순천 선암사 뒤뜰 차밭2.
순천 선암사 뒤뜰 차밭2.

 

효당 스님의 차살림 신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차도무문(茶道無門)’이다. 차의 길에는 열거나 지나가야 할 문이 따로 없고, 특별한 격식이 없고, 누구나 찻자리에 모실 수 있고, 특별히 차를 마실 때는 늘 모든 은혜에 보답하려는 보은의 마음을 강조하였다. 우리 불교에서 강조하는 사은(四恩)과도 통한다. 중국 송의 도성(道誠)의 《석씨요람(釋氏要覽)》에는 부모의 은혜, 사장의(선생과 연장자) 은혜, 국왕의 은혜, 시주의 은혜를 기본이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반야가 역경한 《심지관경(心地觀經)》에서는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왕의 은혜, 삼보의 은혜를 들고, 일체의 중생은 모두 사은(四恩)을 진 존재라고 주장하며, 사은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모두 은혜에 감사하며 갚아야 한다는 것이 업보를 중시하는 불교에서는 당연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은(謝恩)을 차도로 연결한 것도 효당 선생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풍양속이 차례이며, 차를 마시는 것 그 자체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 역시 우리 차계가 앞으로 가야 할 지향점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남에게 불편함과 위화감을 주고 나아가 차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차인의 길이 아니며 차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효당 선생은 그저 차를 마시면 되는데 조직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중의 한결같은 요구를 사양만 할 수 없어서, 청사 안광석 선생(서울), 청남 오제봉 선생(부산), 토우 김종희 선생(대구), 의재 허백련 선생(광주), 윤병규 선생(대전), 은초 정명수 선생(진주)을 비롯하여, 아인 박종한 선생과 채원화 원장과 함께 ‘한국차도회’를 결성하게 된 일화도 유명하다.

효당 스님은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유학을 가지 않은 원효 성사를 성인의 경지로 추앙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불교의 큰 틀에서 국학과 낭가사상을 결합한 분이 원효라고 보고 자신의 호를 원효(元曉)에서 효(曉)를 따서 효당이라 자호하였다. 그리고 그의 맏제자로 부인이 된 채정복에게는 원효(元曉)의 원(元)을 받아 원화(元和)라고 호를 내렸다. 효당 스님의 열반 후에는 채원화 원장이 대를 이어 효당의 차정신을 잇고 있다. 지금은 그 영식(令息)이 원화에서 화를 받아서 화정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효당 최범술-원화 채정복-최화정으로 이어지는 차맥 그 자체가 반야로차도문화원의 오래된 미래이며 우리 차계의 그것과도 운명을 같이할 것 같다.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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