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한국 차도계의 거목 채원화 원장을 만나다 ①

중3 때 효당 찾아 다솔사 방문

반야심경 접하고 마음 병 치유

효당 수제자로 12년 동안 공부

15기까지 1천여 명 제자 배출

차의 나라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중국과 일본을 떠올린다. 물론 인도나 스리랑카도 있고 대만도 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리나라는 아닌 것은 비슷할 듯하다. 사대주의나 친일과는 별개로, 차의 종주국은 중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차인이라면 영화 속에 나오는 기모노를 입고 말차를 만드는 일본 차인들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 듯이 늘 떠오른다. 아울러, 중국의 차문화가 아편전쟁과 공산화 그리고 문화혁명 등 급변기를 맞아 위축되었을 때, 그 공백을 제국주의와 식민지지배를 등에 업은 일본의 차문화가 차지한 듯한 인상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역시 중국이나 일본에 버금가는 차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차문화와 늘 함께 했던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나라 역시 우리나라였다. 선차(禪茶)뿐만 아니라, 유가(儒家)선비들의 차문화 역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런 차문화가 이어져 왔기에 다산·초의·추사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시작된 차문화가 오늘날 면면히 이어져 온 데에는 일제 시대 이래 한 인물의 역할이 크다. 바로 한국 차도계 선구자였던 효당 최범술(1904~1979) 선생이다.

우리나라 나라 차문화 역사가 일제 36년과 6.25를 겪으면서 거의 소멸된 것을 중흥하자고 깃발을 높이 든 현대 차문화 중흥조(中興祖)는 다름 아닌 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 선생이다. 한국차인연합회 박권흠 회장은 “1979년 한국차인연합회 창설 무렵 한국에 다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한국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을 때 효당 선생은 경남 사천 다솔사에서 수많은 제자를 불러 모아 차문화와 다도를 가르치고 《한국의 다도》를 발간한 분이다. 나아가 ‘효당 선생이 그때 차문화 중흥의 깃발을 들지 않았으면 과연 오늘의 차문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고 하며, 효당 선생 앞에 전국 차인들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향기로운 우리 차로 헌다례를 올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역설했다. 이와 같이, 한국 차문화계, 즉 다도가 아닌 ‘차도’의 최고 어른인 종장(宗匠)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가인 효당 최범술 선생이다.

사진1 : 반야로 채원화 원장의 행다법은 늘 진중하기 그지 없다.
사진1 : 반야로 채원화 원장의 행다법은 늘 진중하기 그지 없다.

 

효당차도의 종지를 계승한 한국차도계의 본가는 다름 아닌 ‘반야로차도문화원’으로 그곳에는 채원화 원장이 있다. 진주사범병설중학교가 생긴 이래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던 최정복(채 원장의 본명)은 중3 때부터 삶의 번뇌에 대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는 출가한 외삼촌을 따라 다솔사에 왔으나 그 당시 효당 선생은 대학 강의 때문에 부재중이라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낡은 벽지와 수많은 고서 등 옛 골동품이 잘 정리된 모습을 보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듯한 경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아울러, 밤에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 대용으로 쓰이는 반야심경 원고 뭉치를 발견하고 그 안의 공(空)자를 보는 순간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한다.

교과서 한 권도 없이 건성으로 다닌 고등학교 실력으로 30명 모집에 668명이 지원한 연대 사학과에 3등으로 합격한 채 원장은 청바지에 잠바를 걸쳐 입은 최초의 여대생이었다. 원효사상에 대한 졸업논문을 쓰다가 지도교수의 권유를 받고 효당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렇게 만난 효당 선생의 수제자이자 반려자로 효당 선생 밑에서 반야로차를 만드는 방법을 12년 동안 배웠다.

‘반야로’라는 차 이름은 효당 최범술 선생이 직접 지은 것으로 우리 불교에서 지혜라는 뜻을 가진 반야(般若)에 이슬 로(露)자를 합친 것으로, 지혜의 이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마시면서 반야 지혜를 얻게 하는 차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채 원장이 만든 차에만 붙여지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반야로 수백 통은 반야로차도문화원 문하생들에 의해 대부분 소비되어 시중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다. 채 원장은 효당 선생 입적 후에도 다솔사에서 3년을, 그 후 지리산 화개면 칠불사 아랫마을에서 16년간을, 2000년부터 다시 경남 사천시 곤명면 그의 반야로 차밭이 있는 용산마을에서 그리고 지금도 화개 등에서 차를 구해 반야로 차를 만들고 있다.

사진2 : 창경궁의 가을 나무 한그루가 채 원장을 연상시킨다.
사진2 : 창경궁의 가을 나무 한그루가 채 원장을 연상시킨다.

 

채 원장이 1983년 7월 2일 설립한 반야로차도문화원에서는 우리의 전통차법을 철저하게 가르친다. 처음에는 10여 년 이상 아무도 수료시키지 않았으나, 이후 생겨난 다른 차문화원에서 수료생들이 배출되자, 제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부득이 십여 년 정도 가르친 제자들을 중심으로 1기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후 3년 이상의 교육과정을 거친 15기의 문하생을 배출해냈다. 그동안 그의 강의를 거쳐 간 차도인은 어림잡아 1천여 명을 훌쩍 넘을 것이다. 현재 16기 수업이 나마스떼코리아의 지원으로 다시 시작될 예정이어서 더욱 기대가 크다.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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