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종로3가엔 탑골공원이 있다. 예전에 이곳엔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의 명에 의해 건립된 원각사가 있었다. 꽤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세조는 어린 조카인 단종과 사육신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런 그가 사찰을 건립한 것은 참회의 뜻이었다.

그러나 원각사는 늘 아슬아슬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기회만 있으면 폐사를 주장했다. 왕이 지은 절일지라도 존립이 위태로웠다. 유학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고, 그 지배력은 왕의 의지도 꺾을 기세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종 때부터 원각사의 운명은 아슬아슬했다. 유생들은 대종을 치는 것을 금지하라고 상소했고, 사찰에서 난동을 부린 것도 모자라 스님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화재 복원에 필요한 지원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로 옮기도록 명했으며, 악사와 기생의 숙소로 전락하면서 폐사했다. 이후 드문드문 민가가 들어섰으며, 전각은 무너지고 석탑과 비석만 남았다. 한때는 도둑의 소굴이 되기도 했다.

원각사 10층석탑은 드물게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높이가 12m에 달해 멀리서도 그 위용이 눈부셨다. 지금이야 빌딩 숲 가운데에 있어 존재감이 덜 하지만, 당시에는 우뚝 솟아 멀리서도 보였을 것이다. 박제가는 원각사 탑을 묘사하길, “빙 둘러 있는 성 가운데에 백탑이 있다. 멀리서 삐죽 솟은 것을 보면 마치 설죽(雪竹)의 새순이 나온 듯하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서구, 이덕무 등이 이곳에서 자주 모임을 했고, 그때의 글을 모아 <백탑청연집 白塔淸緣集>을 엮어냈다. 박제가가 이 문집의 서문을 썼는데, 그들의 교류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이덕무의 사립문이 백탑의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조선 말까지 빈터로 남았던 이곳이 공원이 된 것은 1897년이었다. 대한제국의 고문이었던 브라운이 설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뜨거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해방 이후의 불교사에서도 이곳은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관음종 개산조인 태허당 홍선 스님이 1960년대 초 거리 포교를 펼쳤던 곳이다. “조사 스님은 매일 파고다공원에서 법문을 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덥거나 추워도 하루를 빼놓지 않았다. 대개 수업시간의 한 시간에 해당하는 50분 정도를 법문했다. 재미있고 쉬운 방법으로 묘법연화경의 가르침을 설했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질문하는 이도 있었고, 삶의 고민을 법문 내용에 견주어 묻는 이들도 있었다.” 홍선 스님의 평전 <인생탈춤>에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야단법석은 2년 정도 이어졌는데,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터지면서 계속할 수 없었다. 홍선 스님의 파고다공원 법문은 소문을 타고 방송국까지 알려져 라디오서울에서 불교강좌를 펼치는 것으로 이어졌다.

탑골공원 북쪽 울타리 너머로 눈을 돌리면 허름한 3층 건물에 걸린 ‘(구)원각사 노인무료급식소’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노숙인과 노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곳이다. 1993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오랜 공덕이다. 원경 스님의 자비 원력과 수많은 이들의 후원과 급식 봉사로 매일 따뜻한 밥상이 차려지고 있다.

원각사는 장악원이 되었다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백탑파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며, 파고다공원,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 원각사의 외형은 흩어진 지 오래지만 뜨거운 포교․자비 원력이 이어지고 있다. 모양을 갖춘 것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멸은 끝이 아니다. 생이 움트는 자리가 된다. 만해의 노래가 떠오른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