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시끄러워도 가을은 또다시 찾아왔다. 초봄의 매화는 하얀 눈과 찬 바람을 배경으로 한 점 핏방울처럼 피어나더니 가을 산의 낙엽은 떠난 이를 위한 손수건처럼 망연히 세상을 적막 속으로 끌고 간다.

남몰래 가을을 기다린 사람이 있다면, 그의 가슴에도 봄 매화의 핏방울 한 점이 있고 낙엽 같은 공적의 징표도 있을 것이다. 하여 이 가을엔 좀 덜 외롭고 좀 덜 아프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가? 정치는 정치대로 시끄럽고 경제는 경제대로 혼란하다. 긴박한 뉴스를 들으며 시작한 하루는 실망스러운 뉴스를 들으며 마무리하고, 쨍한 가을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 없이 시간에 떠밀리고 일에 억눌려 사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얽히고 설킨 인연의 미로를 따라 살아갈 뿐이다. 고통을 고통으로 치유하며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덧입히면서 말이다.

인드라망이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그물이다. 이 그물은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늪과도 같다. 인과(因果)의 그물을 벗어나려고 인을 부정하고 과를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불교는 원인을 잘 지어 좋은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를 더 좋은 인으로 삼는 지혜를 가르친다. 그 가르침의 핵심이 공(空)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을바람에 뒹구는 낙엽에서 공의 설법을 들어야 한다. 눈보라 속에 피어나는 매화의 빛과 향에 감탄만 할 게 아니라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를 궁구하는 노력으로 만상의 공함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그래야 우주의 실상이 무엇이고 그 속에 놓인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알아야 나의 행복과 나의 가치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예로부터 선지식들은 천지가 동근(同根)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온갖 꽃으로 화사한 등불을 켜는 봄날의 나무도 적막한 풍경으로 무상을 설법하는 가을의 나무도 그 뿌리를 대지에 묻고 튼실한 줄기로 허공을 버티며 무수한 가지를 길러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한 나무의 생장이 대지에서 시작하여 허공을 거느리듯 우리의 삶도 마음이라는 하나의 토양에 육근을 갖춘 몸으로 이리저리 인과의 그물 속에서 업보의 생을 길러나가고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곤충이나 온갖 짐승이나 다를 것이 없다.

《법화경》 ‘약초유품’이나 《금강경》 ‘일체동관분’이 설하는 대의는 모든 생명이 갖는 본질에 있다. ‘약초유품’이 존재의 공덕과 은덕을 가르친다면, ‘일체동관분’은 만 생명의 본질이 공성(空性)임을 가르친다. 매화든 낙엽이든 색이 붉어졌다고 그 색만을 바라보며 계절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색 이전의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진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보이는 그대로만 보면 껍질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보려 노력하면 인과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지혜도 자라난다.

가을 산을 보면서 생각한다. 부처님이 설하신 육안과,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을. 이 다섯 가지 눈을 갖추어 세상을 보면 저 낙엽은 무엇으로 보이고 가을 산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혜능대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다섯 가지 눈이 갖추어져 있다고 설했다. 중생이 미혹을 벗어나면 부처이니, 미혹을 벗어난 눈은 당연히 불안이 될 것이기에 그 법문은 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 눈이 보는 것은 울긋불긋 단풍 든 가을 산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중생의 눈으로 중생의 세상을 바라볼 뿐이니 망상의 그물 속에 나만의 우주를 지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 가을 두 손을 모으고 염원해 본다. 내 눈의 뿌리가 좀 더 청정해져서 보이는 모든 것이 청정하기를. 내 귀의 뿌리가 좀 더 맑아져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선량하기를. 내 코의 뿌리가 좀 더 깨끗해져서 느껴지는 모든 내음이 향기롭기를. 내 혀의 뿌리가 좀 더 진실해져서 내뱉는 모든 언어가 진실하기를. 내 의식의 근원이 좀 더 선량해져서 지어지는 모든 생각이 세상에 좋은 영향이 되기를. 맑은 바람 한 줄기가 거느리는 가을의 풍경 속에서 잠시 순해지는 내 영혼!

-시인, 금강신문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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