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의 ‘그 꽃’

 

필자는 몇 년 전부터 가까운 것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소위 노안(老眼)이 온 것이다. 굳이 돋보기까지는 쓰지 않지만, 책을 보려면 안경을 벗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안경을 벗은 채 책을 보는 게 익숙해질 무렵 필자는 노안이 오는 이유에 대해 궁구했다. 어쩌면 그 이유는 가까운 곳을 보면서 살라는 천명(天命)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고은의 ‘그 꽃’이나 나태주의 ‘풀꽃’이나 신경림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 시편들이 떠올랐다.

신경림 시인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서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고 회고했다. 어린 화자가 밤중에 눈을 뜨고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다. 화자는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고, 소년이 되어서는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화자는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처로 나갔고,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화자의 시야는 차츰 좁아졌다. 결국 화자의 망막에는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게 되었다. 세상에는 시야가 좁아지고 나서야 볼 수 있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다. 금나라를 정복한 뒤 본격적인 유럽 원정에 나서 모스크바 공국을 점령하고 러시아 최대 도시인 키예프까지 손에 넣은 뒤 폴란드를 지나 독일의 슐레지엔까지 점령하였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무너뜨리고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했다. 몽골군들은 이르는 곳마다 사슴문양을 새겨놓았다. 사슴은 몽골사람의 고향인 초원에 사는 동물이다. 따라서 가는 곳마다 사슴문양을 새겨놓은 것은 향수(鄕愁)의 표현인 것이다. 말을 타고 달려서 영토를 넓힐수록 몽골제국의 용사들은 시야가 좁아져 결국 망막에는 고향의 초원만 어른거렸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몽골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다른 나라의 침입이 아니라 내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진시황은 호(胡)가 진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정작 진나라를 망친 것은 오랑캐 호가 아니라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胡亥)였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노안이 오는 이유는 가장 가까운 곳을 보고 살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준엄한 하늘의 명령인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의 ‘풀꽃’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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