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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3(2019)년 12월 12일 목요일
삼국시대의 거대목탑들
삼국시대의 거대목탑들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4.05.0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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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수 완/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수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이후 건립된 사찰들에 어떤 형태의 탑이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고구려에 처음 세워졌다는 초문사나 이불란사의 위치조차 알 수 없고, 신라에 가장 먼저 세워졌던 흥륜사도 지금 그 위치에 대해 논의가 분분할 정도이니 당시의 흔적을 더듬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사찰에 있어서 탑의 의미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떤 형태로든 탑이 세워졌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성왕(聖王)이라는 왕이 요동성 인근을 순행하는 중에 오색구름에 감싸인 흙으로 쌓은 3층탑을 발견했는데, 이를 더 파보게 했더니 인도 글자로 ‘불탑’이라는 명문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7층의 목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 탑은 인도의 아쇼카왕이 세운 8만4천개의 탑 중 하나로 여겨졌다. 성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어 아쉽지만, 여하간 고구려에도 아쇼카왕 전설이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신라의 경우는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제가 549년에 진흥왕에게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보냈다고 한다. 이를 흥륜사에서 맞이하였다고 하니, 흥륜사에도 진신사리를 모신 불탑이 있었던 것인데 이 역시 아마도 목탑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진신사리의 입수 기사가 보이지 않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584년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이 보낸 진신사리를 오노노오카(大野丘)에 목탑을 세워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이전에 이미 백제에 진신사리가 전해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위덕왕대에 세워진 목탑의 터가 부여 왕흥사지 및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되었다.

비록 이 시대의 목탑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흔적을 알 수 있는 유구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우선 고구려의 경우는 평양의 정릉사지에 팔각형 평면의 목탑지가 발굴되었으며, 이러한 팔각형 목탑지는 금강사지, 청암리사지 등에서도 발견되어 고구려에서는 팔각형 평면의 탑이 주로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탑은 강원도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의 시원적 형태로 간주되기도 하다. 백제의 경우는 부여 왕흥사지, 능산리사지 등에서 위덕왕 시기에 세워진 목탑지가 발굴되었고, 비교적 근년에는 이보다 앞선 한성백제기, 즉 백제 초기 도읍지에 세워진 백제 최초의 목탑으로 생각되는 터가 서울 풍납토성 안에서 발굴되어 주목을 받았다.

실제 목탑의 흔적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은 익산 미륵사지와 경주 황룡사지의 목탑지가 있다. 이들 두 절터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가람들이고, 따라서 목탑도 그에 어울리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이를 통해 삼국시대 후반에 이르러 석가모니 사리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삼국의 정세 속에서 사람들은 더더욱 석가모니의 사리로부터 영험한 힘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미륵사지 목탑의 높이는 9층 규모에 대략 50~60m 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교하자면 보은 법주사 팔상전의 2~3 배가량 되는 높이이니, 그 장중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거대한 목탑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기록에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더욱 백제 망국의 한을 느끼게 한다. 그나마 이 목탑 양 옆에 세워졌던 석탑 중에 동탑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 대략적인 짐작을 가능케 할 뿐이다. 이 석탑은 특히 중앙에 있던 목탑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인지 돌로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무로 만든 느낌을 준다. 이런 독특한 느낌의 석탑은 삼국 뿐 아니라 다른 불교문화권 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매력적인 것이다.

묵중한 돌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뿐하게 솟아오르는 지붕돌의 처마선은 󰡔삼국유사󰡕의 설화에서처럼 땅에서 솟아오른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던 미륵사지 동석탑은 현재 완전 해체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백제 무왕의 왕비가 봉헌한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는데, 당시 왕비가 󰡔삼국유사󰡕에서 알고 있던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가문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되어 있어 ‘서동(무왕)과 선화공주’ 로맨스의 진실성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로 사택적덕의 따님은 선화공주 사후 무왕이 두 번째로 맞이한 왕비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경주 황룡사의 9층 목탑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의 기여로 만든 탑이라고 전한다. 아마 미륵사지 목탑과 같은 거대한 탑을 건축한 경험이 있는 백제 건축가의 역량이 이 탑의 건립에 중요했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어쩌면 백제에서는 장인어른의 나라에 이런 하이테크 건축기법을 선물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높이는 미륵사탑보다도 더 높은 70m 내외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층 목조건축은 당시로서 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매우 고난이도의 건축술이 요구된다. 흔히 전통건축이란 단층짜리의 허약한 집으로 생각하지만, 목부재를 X,Y,Z의 축으로 짜맞추어 조립하는 방식은 사실 재료만 바뀌었을 뿐 현대의 고층건물에도 적용되는 기법이다.

이 탑은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이 보았을 정도로 오래 동안 신라 삼보 중의 하나로서 경주 서라벌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했었지만, 아쉽게도 몽골의 침입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특히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는 중국 유학 중에 구해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643년 귀국 후에 세 군데에 나누어 봉안했는데, 통도사 금강계단, 울산 태화사, 그리고 바로 이 황룡사 목탑이었다.
 
현재 목탑지의 중심에 있는 큰 돌은 찰주를 받치던 부재였는데, 여기에 사리공을 만들어 자장율사의 진신사리와 함께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몽골 침입으로 목탑이 불타면서 누군가 그 안의 사리장엄구를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돌을 덮어 올려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삼국시대의 목탑들은 비록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마치 거대한 파충류들이 살았던 쥬라기 시대를 화석을 통해 복원해낼 수 있는 것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각지에서 발굴되는 초대형 목탑지 유적들은 당시의 열렬한 사리신앙과 함께 우리나라 곳곳에 고층목탑이 세워져있던 거대불탑의 시대를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