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기계발서 중에서“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접한 적이 있다. 본문을 읽지는 않았기에 속 내용은 모르겠으나 그 제목만으로도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의 답변이 나오겠지만 아마도 ‘연기법’이 공통분모가 되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들은 과연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얼마만큼이나 변화시키고 있을까? 불자들에게 묻고 싶다. ‘연기법을 알게 되니까 현실의 삶이 행복해 졌는지!’ 부처님이 제시한 연기법을 이해하고 알았다고 하여 그 지식이 자신의 현실에 나타나는 장애나 고통을 해결하는데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돌아보면 아마도 회의적일 것이다. 단지 연기법을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이론화하여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회피하는 형태로 쓸지 모르겠으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고득락’을 성취하는 경험은 드문 일이다. 왜 이런 모순이 일어나는 것인가? 분명히 부처님의 가르침은 관념적이고 허망한 것이 아니다. 초기경전 《니까야》에서도 “이 법은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성질의 것이며, 누구에게나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들이 연기법을 잘못 적용하거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위 책 제목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그동안 속도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시선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시선의 방향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연기론의 기본공식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이다. 이 말씀을 그동안 우리는 생과 멸, 또는 존재현상을 상호 의존(연관)관계와 상호 순차적 관계로만 해석했고, 그렇게만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 연기의 현상에는 ‘동시’ 또는 ‘동일성’의 특성도 내포하고 있음을 상기해야한다. 즉 서로 다른 현상이나 존재가 동시에 같이 일어나고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들어서 안다. 어둠과 빛은 같이 있다는 것을, 번뇌와 보리는 같이 있는 것이고 고통과 즐거움도 함께 붙어있다는 말씀을. 이런 주장들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색과 공이 같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만법은 이러한데 우리의 인식구조는 그 둘 중에 하나에만, 한쪽 측면에만 머물고 집착하여 자신이 인식한 것만이 진실이고 실체라고 믿어버리는 오류에 빠진 삶으로 점철돼있다. 이런 어리석은 의식의 작용을 바로잡는 방법은 시선의 ‘방향성’의 전환에 있다. 이 도전은 가히 혁명적 사고의 전환이어서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보통 혁명을 하는 데는 피를 담보로 한다. 즉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마음에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것도 생각만 바꾼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에게 닥쳐오는 경계들을 이와 같은 의식이 작용되는 방향성에 집중하여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만일 사업이 실패했다면 당장 좌절의 고통이 있지만 연기법의 ‘동시성’에 의한다면 사업실패와 동시에 분명히 그동안 사업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들, 또는 인생에 있어서 놓쳤던 소중한 것들이 ‘실패’라는 절망 속에 희망이 함께하고 있음을 믿고 시선의 방향을 바로 옆으로 이동하는 힘을 기른다면 ‘사업실패’에 가려져 보지 않았던 ‘희망’의 존재가 보이게 되어 고통은 즉시 그 힘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처님의 연기법을 일상에서 적용해 간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맺을 것이다.

세속에서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말한다면 불자에게는 “깨달음은 내용이 아니라 시선의 전환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행복자비선원장 ㆍ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평론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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