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조는 종단의 존재 원천
북한산 태고사는
종단의 상징적 사찰
태고사 인수 모연 불사에
종도들 동참 뜨거워
‘태고암가’ 되새겨보며
구심력 더욱 발휘할 때

 

종조(宗祖)는 그 종단을 존재케 하는 상징의 원천이다. 그 원천의 물이 흐릿해지면 종단의 종지(宗旨)⦁종풍(宗風) 또한 흔들리게 되고, 그것은 자연히 종도들의 분열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종조의 확고한 자리매김은 종도들의 애종심과 자긍심을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된다.

북한산 태고사는 태고종 종조인 태고보우 원증 국사가 주석했던 종단의 상징적인 사찰이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태고사 인수 모연 불사가 갈수록 뜨겁다. 처음엔 환경적 요인 등으로 조금 망설이던 종도들마저 이젠 인수 모연 불사에 발 벗고 나섰다.

종단에 대한 애종심과 자긍심의 부피를 재는 필자 나름대로의 방정식이 있다. ‘종단에 대한 애종심과 자긍심=종조에 대한 외경심+종단에 대한 공심과 헌신+종무행정기관(총무원)에 대한 신뢰와 격려(성원)’이다.

종단의 권위는 종헌⦁종법⦁관례 등에 따른 종도들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에 바로 종조가 있다. 태고사는 바로 그 종조의 부도탑(보물)과 부도비(보물)가 있는 사찰이다. 태고보우 국사는 그곳에 주석하면서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그리고 46세 때인 1346년 원나라에 건너가 임제 18대 손인 석옥청공 화상에게 이 게송을 바쳤다. 그 결과 석옥청공으로부터 태고라는 이름과 함께 법을 인가받고 우리나라 임제종의 시조가 됐다. 이 기회에 <태고암가>를 되새겨보는 것도 태고종도로서의 자긍심과 애종심을 고취하는데 더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모르네/ 깊고 좁지만 옹색함이 없네/ 하늘땅 덮개 삼으니 앞뒤가 없고/ 동서남북 어느 곳에 머묾도 없네/ 구슬누각 옥전각에 비할 바 없고/ 소림사 풍습과 규정도 따르지 않지만/ 팔만사천 번뇌 문을 다 부숴버리니/ 저편 구름 밖 청산이 푸르네// 산 위의 흰 구름은 희고 또 흰데/ 산속의 샘물은 끊임없이 흐르네/ 저 흰 구름의 얼굴을 누가 볼 것인가/ 비 오고 개이는 것 번개 같은데/ 이 샘물 소리 누가 들을까/ 천 구비 만 구비 돌아 쉬지 않고 흐르는데/ 생각을 내기 전에 벌써 틀렸고/ 다시 입을 열면 더욱 부질없네/ 비 오고 서리 내린 세월 얼마인가/ 심히 한가한 일임을 오늘 알겠네// 맛없는 밥 맛있는 밥/ 모든 사람이 제각각 먹으니/ 운문의 떡이나 조주의 차도/ 어찌 이 암자의 맛없는 밥만 하랴/ 본래 이 같은 옛 가풍을/ 누가 있어 기특하다 논할 것인가// 한 가닥 털끝 위의 태고암/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지만/ 겹겹의 극락정토 그 속에 있고/ 넘치는 가르침의 길 하늘로 뻗었으나/ 삼세여래도 그 뜻을 알 수 없고/ 역대 조사도 벗어나지 못하네// 어리석고 어눌한 암자의 주인공/ 도리에 순종하지 않은 행함에 궤칙이 없으며/ 청주에서 지은 헤진 삼배적삼 입고/ 등나무 넝쿨 속 바위에 기대서니/ 눈앞에 법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아침저녁으로 푸른 산만 보고 있다”(吾住此庵吾莫識 函盖乾坤沒向背 珠樓玉殿未爲對 少室風規亦不式 爍破八萬四千門 那邊雲外靑山碧// 山上白雲白又白 山中流泉滴又滴 誰人解看白雲容 晴雨有時如電擊 千回萬轉流不息 念未生時早是訛 更擬開口成狼藉 經霜經雨幾春秋 有甚閑事知今日// 麁也飡細也飡 任儞諸人取次喫 雲門糊餠趙州茶 何似庵中無味食 本來如此舊家風 誰敢與君論奇特// 一毫端上太古庵 寬非寬兮窄非窄 重重刹土箇中藏 過量機路衝天直 三世如來都不會 歷代祖師出不得// 愚愚訥訥主人公 倒行逆施無軌則 着却靑州破布衫 藤蘿影裡倚絶壁 眼前無法亦無人 旦暮空對靑山色)-<태고암가> 부분

이 게송을 보고 석옥청공 화상은 “참으로 공겁(空劫) 이전의 소식을 얻은 것으로 ‘태고’라는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며 태고보우 국사에게 임제법을 전해준 것이다.

사실, 종도들의 애종심과 자긍심의 함량을 눈으로 가늠할 순 없다. 종단에 어려움과 장애가 있을 때 종도들의 참여와 동참 용량으로 그 부피를 측량할 수밖에 없다. 태고사 인수 모연 불사 두 달여 만에 10만 원에서부터 1억 원까지 수십 명의 종도들이 마음을 내 목표치의 절반 가까이 도달했다. 태고보우 종조와 태고사 없이 태고종의 구심점은 있을 수 없다. 종도들의 더없는 구심력이 필요할 때다.

-주필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