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전래 과정을 보면, 왕실불교 또는 국가불교의 성격이 짙게 배어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도 그렇다. 불교 전래 당시의 사회는 왕과 귀족계급이 지배권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여기에 이질적인 문화가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동의와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불교 전래는 필시 갈등의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불교의 가르침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흔드는 것이었기에 순탄할 리 없었다. 우리 역사에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지배적인 사상은 유교와 무속, 토속신앙이었다. 왕권이 강화되기 이전이었으니, 귀족계급의 신앙이자 사상이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삼국의 부족연합의 과두지배체제였다. 왕일지라도 귀족계급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으며, 고구려의 장수왕, 백제의 성왕, 신라 법흥왕은 불교에 눈을 돌렸다. 기존의 사상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귀족계급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엇이 요청됐던 것이다. 새로운 질서는 때로 전복적인 장치를 필요로 했는데, 이차돈의 순교는 매우 극적으로 진행됐다.

이차돈은 귀족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천경림을 베어낼 정도로 반귀족적인 왕권강화론자였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역사 속의 한국불교』에서 법흥왕과 이차돈의 대화를 통해 이 사건이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차돈이 왕에게 말했다. “저의 목을 베십시오. 그러면 이변이 일어날 것이요. 이를 본 신하들이 감동해 다시는 반대치 않을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샤머니즘에 기반을 둔 귀족계급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불교는 계급질서를 옹호한 유교와 달리 자비와 평등의 가르침이었으며, 유유자적하는 도교와 달리 체계적이었으니 귀족 중심의 기존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데 기여했다. 당시 왕권 강화는 사회 발전의 한 과정이었으니, 불교가 그런 역할을 한 것은 긍정적인 기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백성들의 귀의처가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서 불교는 더욱 영향력이 커졌으니, 국가불교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빛이 세면 그림자가 짙기 마련이다. “왕실과 사찰은 신라 말기보다도 더욱 절도를 잃고 있었다. 그리하여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참회하는 법회를 열어 씻어내고 나쁜 짓을 하고도 작은 선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부처에게 빌기만 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잘살고 복을 받는다는 의타적 의식이 왕실과 민중을 가릴 것 없이 온 나라에 팽배하였다.”(이이화)

불교가 권력과 결탁하면 끝내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불교라는 허울을 쓰고 반불교 행위를 일삼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는 역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일본에서도 그런 사례가 나타났다. 일본 군국주의와 만난 불교는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특히 선종 계열의 일본불교는 ‘천왕을 위해 죽는 것이 곧 열반’이라는 허무맹랑한 논리를 펼쳤다.

종교의 역사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벌인 반종교적인 행위는 수없이 많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15~19세기 서구의 제국주의 침탈에 기독교는 적극 참여했다. 그런 까닭에 종교의 과거사에 대한 참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캐나다를 방문한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토록 많은 기독교인이 원주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악에 대해 겸허하게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했다.

교황이 언급한 악이란, 19세기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들을 백인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 설립한 기숙학교를 가톨릭교회가 위탁운영하면서 온갖 학대를 자행해 3천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숨진 사건과 원주민 언어와 문화, 공동체를 파괴한 행위를 가리킨다.

교황은 특히 “많은 기독교인이 원주민들을 탄압한 열강들의 식민화 사고방식을 지지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낀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식민지배권력의 논리에 굴복해 자기 모습을 잃어버린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이다.

불교와 정치권력과의 적정거리는 얼마일까.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비유가 떠오른다. 이를 의존과 인연을 넘어선 자유인들의 연대라고 풀이해본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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