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혜근, ‘뜰 앞의 잣나무’, ‘백납’, ‘취모검’

 

나옹혜근(1320∼1376)은 20세에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삶의 무상을 느껴 공덕산(현 문경의 사불산) 묘적암 요연선사에게 출가하였다. 그 후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치열한 용맹정진의 수행을 통해 크게 깨달았다.

허공을 에워싸면서도 그림자도 형체도 없어 包塞虛空絶影形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본체는 항상 청정하구나 能含萬像體常淸
눈 앞 진경을 누가 능히 헤아린다 할 것인가 目前眞景誰能量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은 밝아라. 雲卷靑天秋月明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본체[본성]은 항상 깨끗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청정한 마음에서 빚어진 삼라만상이 곧 법계이고, 그러한 참 경계를 깨닫고 나니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본성]이 밝게 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나옹은 원나라에 건너가 연경의 법원사에 주석하던 인도 승려 지공화상을 만나서 선문답을 하였다. 지공화상은 “서천에 스무 명의 깨달은 이가 있고, 동토에 72명의 도인이 있다고 했는데, 나옹이야말로 일등이로다” 하면서 나옹의 법기를 극찬하며 인가하였다.

선은 집 안에 없고 법은 마음 밖에 없나니 禪無堂內法無外
뜰 앞 잣나무 화두는 아는 사람이 좋아하네 庭前栢樹認人愛
맑은 누대 위에 맑은 햇살 비추는 날에 淸凉臺上淸凉日
동자가 세는 모래 동자만이 아느니라. 童子數沙童子知

선은 선방 안에 없고, 법은 마음 바깥에 없다는 것은 내안에 있는 불성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뜰 앞의 잣나무’는 격식을 벗어난 말로, 선가에서 잘 알려진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말한다. 청량한 누대위에서 밝은 태양이 빛나고, 천진무구한 동자가 세는 모래는 동자만이 안다는 것은 청정한 불성을 의미한다.

누덕누덕 헝겊조각을 누벼서 만든 누더기 옷이 ‘백납’(百納)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더기 옷이지만, 걸림 없이 살아가는 선승들이 철저한 무소유 정신으로, 두타행을 몸소 실천하며 만족을 얻었던 삶의 표상이다.

때론 자리로 쓰다가 옷으로 삼으니 或爲席或爲衣
철 따라 때에 따라 적절하게 쓰이네 隨節隨時用不違
이로부터 두타행에 만족할 줄 아나니 從此上行知己足
가섭 존자 끼친 자취 지금에도 살아있네. 飮光遺跡在今時

‘백납’은 수행자의 일상생활에 있어 자리로도 쓰이고, 옷으로도 삼으며, 철따라 때에 따라 알맞게 쓰인다. 수행자에게는 한 잔의 차와 일곱 근의 장삼이면 족한 삶이기에, 편리한 누더기 옷이 현란한 금란가사 보다 낫다는 것이다. ‘음광유적’은 가섭존자에게서 시작된 선맥이 나옹 자신에게 그대로 이어져 계승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한편, 청정심에서 나오는 지혜의 칼날은 무명을 자를 때는 날카로운 칼이지만, 번뇌를 자르고 나서는 밝은 빛을 수반하는 보배로운 칼이 됨을 나옹은 강조한다.

임제의 종지가 땅에 떨어지려 할 때 臨濟一宗當落地
난데없이 고담선사가 돌출하였네 空中突出古潭翁
삼 척의 취모검을 높이 뽑아 들고 把將三尺吹毛劍
정령들 모두 베었으나 흔적이 없네. 斬盡精靈永沒蹤

‘취모검’이란 칼날이 매우 예리하여 머리털 같은 것을 갖다 대고 입으로 ‘훅’ 불기만 해도 잘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리한 칼날은 번뇌 망상을 베어버리는 칼이란 뜻에서 선적 지혜를 상징한다. 번뇌의 구름을 제거하고 나면 본래 청정한 자성의 지혜는 스스로 빛을 발하고, 순일 무잡한 원음의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