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열린 연단’에 들어가 강연과 에세이를 살펴보는데, 최근 ‘불교의 자유론: 초연의 자유’라는 강연을 흥미롭게 들었다. 강연은 지난 5월에 있었다. 강연자는 한자경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불교의 무아론》《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대승기신론 강해》《현대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등의 책으로 많은 이들을 불교철학으로 이끌었으며, 이런 공로로 청송학술상, 원효학술상, 불교출판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강연에서 “불교는 인간을 개체적 본성인 자연도 넘어서고 사회적 관계인 인연도 넘어서는 존재로 파악한다”고 불교의 인간관을 설명하고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인간 존재 및 자유에 대한 총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불교는 그 둘을 넘어서는 제3의 관점을 제시한다”면서 초연(超然)의 자유론을 펼쳤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신자유주의와 전체주의로 치달으면서 인간을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기에 불교의 가르침에 바탕한 한 교수의 초연의 자유론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세상은 새로운 길에 대한 갈망이 크다. 토론에서 청중 질의자로 나선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는 “전혀 새로운 미래의 대안을 개척할 때는 탐구의 수준이 더 깊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종교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한 교수가 제시한 불교의 자유론에 의미를 부여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의 역사는 꽤 깊다.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후 권력이 성립되면서부터 제기된 개념이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권력을 제어할 필요가 생겼으며, 자유는 권력의 자의성과 야만성을 제어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우리나라의 7, 80년대 민주화운동을 떠받쳤던 사상적 기반은 권력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서구의 자유는 개인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적 자유주의라는 두 개의 큰 흐름을 형성하며 오늘날까지 흘러왔다. 특히 자유주의는 80년대 이후 개인적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해 신자유주의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는 개인과 자본의 이익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까닭에 경제는 물론 모든 부문에서 불평등을 심화시켰으며, 급기야 약자의 생존조차 허용하지 않는 비정한 세계를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는 극단적인 이익 추구를 자유라는 명분으로 옹호하고 있다. 이런 비인간화의 상황이 지금 많은 이들이 자유를 논하는 까닭이다.

지정토론자인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는 “철학적으로 매우 탁월한 발상”이라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현실에서 통용되는 정치에 관한 담론이지만 일심의 자유는 깨달음의 세계에서 가능한 심층의식에 관한 담론이기 때문”이며 “단독자가 되어 고립된 삶을 살고자 하는 탈맥락적 자아, 모든 인연을 뛰어넘는 자아는 현실세계에서 과연 존립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즉, 사상으로서는 뛰어나지만, 현실의 역사에서 적용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의 주류는 왕실불교․국가불교였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에서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경험이 왜 없었겠는가. 선불교가 있었고, 원효가 있었고, 민초들과 고락을 나누었던 보살들이 뭇별처럼 반짝였다. 박재현 동명대 교수는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에서 경허 만공 한암 만해, 만공과 나혜석, 김일엽과 김수옥, 농감 박찬조 옹을 불러들였다. “버거운 근대의 날들이 밀려드는 속에서 그들은 화두를 놓치지 않고 낮은 포복으로 근대를 관통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는 근대 서구의 삶의 현장에서 제기되고 발전한 사상인데 반해 불교의 자유론은 역사적 현실과 맥락에서 분리되었다는 이승환 교수의 지적이 아직도 무겁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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