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금강경소’, ‘봄꿈’, ‘원경’

회삼귀일 내세워 천태종 개창
왕자신분 버리고 삭발 출가해
“세속일에 연연 않는다” 결의
법화사상으로 중생제도 앞장

 

"아들 넷이면 한 아들은 출가시켜야 한다"는 국법에 따라 11세 어린나이에 자청하여 개성 영통사 난원스님에게로 출가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선교 대립과 갈등을 원융회통하고, 《법화경》의 ‘회삼귀일’ 사상에 근거한 교관겸수 사상 제창과 천태종을 열었다.

원효스님의 위대함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의천은 원효를 ‘해동교주, 원효보살’로 극찬함은 물론, 형 숙종이 원효에게 ‘화쟁국사’란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 의천이 지난한 구도의 길에서 한 줄기 광명이 되는 지남(指南)을 발견한 것은 바로 원효의 《금강경소》를 만난 덕분이었다.

옳은 말씀 꾸미지 않아도 불심에 들어맞거니 義語非文契佛心
분황사 스님 가르침에 따라 경의 뜻을 찾으리 芬皇科敎獨堪尋
다생을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헤매다가 多生孤露冥如夜
오늘 겨자가 바늘을 만나듯 금강소를 만났네. 此日遭逢芥遇針

원효의 《해동소》에 의거해 《금강경》을 강의하고 나서 기뻐하며 지은 시다. 다생의 어둠 속에서 헤매던 과거와 이제 《금강경》에 대한 원효의 주석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등불을 찾은 환희심이 분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원효의 흠모와 존경은 “오늘 겨자가 바늘을 만나듯” 희귀한 금강소를 만난 기적이라는 대목에서 선명히 드러나 있다.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스님이 되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실천을 위해 인생의 부귀영화를 풀잎의 이슬같이 여긴 의천은 출세간의 법열을 추구하고자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의 길을 찾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는 그의 지극한 구도일념은 〈부귀영화는 모두 봄꿈〉라는 시에 잘 묘파되고 있다.

부귀영화는 모두 봄날의 꿈이요 榮華富貴皆春夢
모이고 흩어짐, 삶과 죽음도 물거품일 뿐 聚散存亡盡水漚
안양에 깃들일 마음 제외하고는 除却栖神安養外
아무리 생각해도 추구할 게 없구나. 算來何事可追求

의천이 해인사에서 지은 이 시는, 왕자였던 그가 왜 출가를 하였는지 그 동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속세가 허망무실하다는 인식에서 그는 더 이상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다진다. ‘버리면 얻는다’는 말처럼, 출세간의 도는 세속의 영화를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토에 인연을 맺어 내생을 기약하겠다는 것이다.

신라통일의 원동력이 된 원효의 화쟁사상은 《법화경》의 중심사상인 ‘회삼귀일’에서 비롯되며, 의천 역시 고려의 불교통합을 위해 원효와 《법화경》이 추구한 통합과 조화를 주장했다. 이는 분열되어 있던 고려 불교계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으로써 법화사상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학인들이 이에 대한 공부에 힘쓰지 않는 우둔함을 국사는 경계했다.

법화는 곧 윤회를 벗는 길임을 圓經本是出離緣
요즈음 사람, 이것에 힘을 안 쓰네 末學區區未勉旃
곁길로 명성 구함 경계 되지만 依傍求名深有誡
끝끝내 잘못인 줄 모르는구나. 可憐終日不知衍

‘圓經’은 원만하고 완전한 경의 의미로, 《법화경》을 가리킨다. 의천은 《법화경》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출세의 본의를 밝히신 경전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방편설에 불과한 다른 종파에 매달리는 학인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경책하고 있다.

요컨대 구법과 전등을 발원하며 수행과 학문, 그리고 강학으로 일생을 살았던 의천은 법화사상이야 말로 중생들이 생명의 자양분을 얻고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묘약임을 확신하고, 경전의 다양한 비유와 상징을 서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불교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할 수 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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