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인간세상을 떠받치는 기반이자 기둥이다. 독일의 생물학자 수잔너 파울렌은 인간이 지구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식물 덕분이라고 말한다. “신생아는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는 그 순간부터 잎과 화초가 내뿜는 산소를 마시며 숨 쉰다. 더 자라나면 우리 인간은 녹색 풀을 먹고 자란 동물의 고기와 우유를 마신다. 혹은 감자, 곡물, 사과, 콩 등을 먹는다. 또 사는 집과 제단, 무덤을 꽃과 잎으로 장식한다. 우리는 식물섬유를 옷감으로 가공하며, 많은 초목과 열매는 인간에게 약이 된다. 또 우리는 식물 재료로 집을 짓고 난방을 한다.”

삶 전체를 식물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수많은 물질의 원료로 쓰이는 원유조차 식물이 만들어낸다. 그러니 인간의 삶은 식물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다. “만약 나무가 없다면, 이 세상에는 종말이 올 것이다.”(남미 원주민 라카돈 인디언의 말)

 식물에 더해 광물 또한 인간의 삶을 떠받치는 고마운 존재들이며,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모두 식물과 광물이 내어주는 물질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한 발짝 나아가, 식물은 태양의 빛을 이용해 광합성이라는 대사활동을 하니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생명들은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식물을 비롯한 떠받치는 존재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나. 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해 파먹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동남아시아와 아마존 밀림은 계속 파헤쳐지고 있다. 불을 질러 숲을 태우고, 길을 내어 밭을 만든다. 옥수수와 콩을 주로 심는다. 소를 먹이기 위해서이며, 사람이 그 소를 고기로 먹기 때문이다.

도시화도 숲을 없애는 큰 원인이다. 유엔이 발표한 ‘2018년 세계인구 전망’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54%가 도시에 산다. 우리나라는 도시화율이 세계적으로 높아 81%의 사람들이 도시에 산다. 1950년 우리나라의 도시인구 비율은 21%였다. 1970년대 중반에 도시-농어촌 인구가 역전되었는데, 이는 산업화 과정과 정확하게 비례한다. 한 세대만에 나타난 현상이다.

 도시화는 때로 문명화라는 번듯한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개발을 긍정적으로 이미지 짓는 포장지 씌우기에 불과하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문명은 자연의 파괴일 뿐이게 된다.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을 지워버리는 자기파괴적 문명이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지구를 지켜낼 수 있을까. 과학은 생명의 탄생과 생성의 비밀을 밝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자연이 주는 공포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무너지는 지구를 지켜낼 것이라는 기대도 받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양날의 칼이다. 짙은 그림자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DDT를 개발한 파울 밀러는 그 공로로 194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DDT는 티푸스와 말라리아를 옮기는 이와 모기의 퇴치나 농약으로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러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으로 유해성이 본격 제기되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많은 나라에서 사용을 금지했다. 나노 기술도 획기적인 기술적 진전이었으나 유해성 논란이 일고 있다. 나노는 10억분의 1을 가리키는 단위인데, 이 기술을 적용하면 물질을 초미세하게 분리해낼 수 있다. 배기가스를 걸러내는 장치에 적용했다. 입자가 미세한 페인트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그런데 나노 기술로 만들어낸 입자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나노 물질이 인체와 동식물의 분자에 침투해 위해를 일으킬 수 있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자연이 자신을 지탱하는 힘은 얼마나 될까. 또는 자기복원력은 얼마나 될까. 무한은 절대 아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극단적일 정도의 이상고온과 폭풍우를 보면 그 힘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임계점에 도달하면 손쓸 새 없이 급격하게 무너지는데, 우리는 그 지점조차 알지 못한다. 보도블록 귀퉁이에서 노란 꽃을 피워 올린 고들빼기 한 포기가 참 예쁘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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