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태고종의 종조로서 중국 원나라 선불교의 거장 석옥청공(1272-1352)으로부터 임제 정맥을 받은 태고보우(1301-1382) 국사는 원효의 화쟁과 회통사상을 계승하여 한국불교가 선과 교를 겸수하는 통불교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사는 13세 때 양주 회암사 광지선사에게로 출가하여 『화엄경』, 『법화경』, 『원각경』, 『반야경』 등을 두루 섭렵하고, 화엄선의 승과에 합격했으며, 특히 ‘만법귀일’의 화두를 참구하고 ‘조주무자’의 공안을 통찰하여 확철 대오하였다. 그 깨달음의 시가 다음의 〈오도송〉이다.

조주의 고불 늙은이가 趙州古佛老
앉아서 천성의 길을 끊고 坐斷千聖路
취모검을 얼굴에 들이댔으나 吹毛覿面提
온몸에 빈틈이 없네 通身無孔窺 여우와 토끼 자취를 감추더니 狐兎絶潛踪
몸을 바꾸어 사자가 뛰쳐나오고 翻身師子露
철벽같은 관문 쳐부수니 打破牢關後
맑은 바람이 태고에 불어오네. 淸風吹太古
                                            - 〈오도송〉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정진하다 죽겠다”며 각오를 다진 지 꼭 25년 만에 취모검으로 모든 분별망상과 만겁의 생사를 끊어버린 환희심의 노래이다. 여우와 토끼가 자취를 감추고 사자의 위엄이 드러난 것은 알음알이의 경계를 뛰어 넘어야 사자와 같이 불조(佛祖)의 세계에 이를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철벽같은 관문 쳐부수니 / 맑은 바람이 태고에 불어오네”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는 경지에서 얻는 법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太古’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존재 원인이다. 이러한 진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일체 속에 있다. 태고는 41세 때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암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그 현판을 '太古'라고 붙이고, 이곳에서 5년여 동안 청산과 백운을 벗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그때 현실의 암자를 출세간의 경지와 자신의 삶과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 <태고암가>이다.

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몰라 吾住此庵吾莫識
깊고 은밀하나 옹색함이 없구나 深深密密無壅塞
천지를 뒤 덮어 앞뒤 없으니 函盖乾坤沒向背
동서남북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不住東西與南北
                                            - 〈태고암가〉 1수

태고 본분의 선지(禪旨)를 ‘태고’라는 어취를 빌려 표현하고 있다. 첫 구절 “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몰라”라고 말한 것은 분별을 초월한 본분 선지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여기에 이 암자에 소요하지만 암자가 천지를 다 담더라도 넘치지 않고, 동서남북 사방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는 그의 탕탕 무애한 선기가 잘 나타나 있다. 태고가 하무산 천호암으로 임제의 18대 손인 석옥청공을 참문하고 〈태고암가〉를 보여드렸는데, 그 순간 석옥청공은 태고가 명안 종사임을 알아보고 임제 정맥의 적자로 인가를 했다. 결국 ‘태고’는 암자의 이름이 되었지만, 태고의 선풍을 담지한 절 이름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선승들은 ‘본심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강조하여, 일체의 번뇌 망상과 세속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선사들이 남긴 이승의 마지막 법문에는 일체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의 삶을 사는 방법이 함축되어 있다. 그 입멸의 순간에 던지는 깨달음의 노래가 ‘임종게’이다. 태고국사는 양산사(희양산 봉암사)에 머물며, 중창불사를 크게 이룩한 후 1382년 여름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 법랍 69세, 세수 82세를 일기로 다음의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인간의 목숨은 물거품 같고 人生命若水泡空
팔십 평생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임종 맞아 가죽자루 놓으니 臨終如今放皮帒
붉은 해가 서산을 넘는구나. 一輪紅日下西峰
                                              - 〈임종게〉

국사의 철저하게 대오한 ‘맑고 텅 빈 원융무애’의 실천적 삶의 궁극적인 순간이 잘 묘출되고 있다. 국사는 자신의 죽음을 지는 해를 보는 것처럼 거리두기를 하며 바라보고 있다. 돌이켜보면, 치열한 수행과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유위법(有爲法)’으로 본다면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아서 실체가 없는 꿈속의 일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는 불과 백년이면 사라질 몸뚱이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여 흔히 육신을 피고름이 가득한 “가죽자루”에 비유한다. 하지만 그 주머니야말로 법을 담는 소중한 법기(法器)이기도 하다. 태고는 피고름으로 뭉쳐진 삶이건 법이 담겨진 삶이건 그것은 한 바탕 꿈속의 일일뿐, 이제 그 일조차 해처럼 세상에서 사라지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일체에 걸림이 없는 생사를 벗어난 적멸의 세계에 들어가는 태고의 선심(禪心)의 시심화는 번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삶에 한줄기 맑은 바람으로 다가와 마음을 적시게 한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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