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어려워
절벽을 아는 이에게
절벽은 더 이상
절벽이 아니라 삶
의심 없이 나아가길

 

하안거도 보름이 지났다. 선방(禪房)마다 취모검(吹毛劒) 익는 소리가 한창이다. 이따금 딱딱 울리는 죽비소리. 취모검을 더 잘 벼리고 익히라는 격려의 방(榜)일 테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앉을 자리를 제대로 못 잡고 초입에서 허덕이고 있을 지도 모르고, 어떤 이들은 다리가 저려 몸과의 싸움에 진땀을 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벌써 절벽의 중턱을 지나 정상 가까이 다다른 이들도 있을 게고, 이미 정상에 올라 해탈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이도 있을 터이다.

사명당(四溟堂)으로 익숙한 송운유정(松雲惟政, 1544~1610) 선사는 이들에게 절벽을 정복하는 법과 절벽을 정복한 후의 하산법을 준엄히 일러주고 있다. 모든 정상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송운유정 선사의 등산법과 하산법은 이렇다.

“가파른 낭떠러지 험한 절벽 깃들 곳 없어도/ 목숨 버리고 몸 잊고 의심 없이 나아가라./ 다시 칼끝 위에서 한번 구르고 엎어져야/ 공겁 이전의 나를 비로소 알 수 있으리라.”[懸崖峭壁無栖泊 捨命忘形進不疑 更向劍鋒飜一轉 始知空劫已前時(현애초벽무서박 사명망형진불의 갱향검봉번일전 시지공겁이전시)](송운유정 선사의 선시 <절벽> 전문)

그렇다. 절벽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정상에 다 올랐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자만이다. 송운유정 선사는 그 자만을 매섭게 경계하고 있다. “다시 칼끝 위에서 한 번 구르고 엎어지”라고, 그래야 “‘세계가 완전히 괴멸(壞滅)해, 다시 다음 세계가 이룩되는 겁에 이르는 사이의 기간’[공겁(空劫)-미생전(未生前)]의 나를 비로소 알 수 있으리”라고, 그러기 위해선 “험한 절벽” 끝에 서서 “목숨도 버리고” “몸도 잊고” “의심 없이 나아가라”고. ‘죽어야’[백척간두(百尺竿頭)] ‘산다’[진일보(進一步)]는 함의다.

맞다. 절벽을 아는 이에게 절벽은 더 이상 절벽이 아니다. 삶[정상(頂上)]이다. 그러나 절벽을 모르는 이에게 절벽은 주검(천 길 낭떠러지)이다. 유정 선사는 그 ‘절벽’을 통해 진짜 생사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일러주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라’(진일보)고. 그래야 ‘산다’고. 《경덕전등록》과 《무문관》도 똑같은 생법(生法)을 이르고 있다. “백 척 높은 절벽에서 손을 놓고 앞으로 한 발 더 내딛어야 깨달음(사는 방법)을 얻는다”(百尺竿頭進一步)고. 그렇다면 보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은 지금 절벽의 어디쯤을 오르고 있을까? 아니, 초입이라도 바로 찾았을까? 납자(衲子)는 아니지만, 안거철이면 필자도 항상 이는 조바심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절벽)은 삶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죽음(내려놓음. 비움)이 없으면 삶 또한 없으므로. 그래서 이형기(1933~2005) 시인은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다(이형기 시인의 <절벽> 부분)며 과감히 투신(投身)하라 했고, 이상(1910~1937) 시인은 ‘절벽’(죽음)을 ‘꽃’(삶)이라며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이상 시인의 <절벽> 부분)며 절벽을 자신의 삶을 위한 무덤이라 했다. 이수익(1942~ ) 시인은 아예 “직립(直立)은/ 화해하지 않는다// 고고한 그의 전신이/ 타협을 거부한 채/ 오롯이/ 하늘을 항하여/ 날카로운 입지(立志)를 세우고 있다/ 그가 주위를 버리는 것만큼/ 주위로부터 그가 버림받는 불행을,// 그는 오히려/ 즐기고 있다”(이수익 시인의 <절벽> 전문>며 절벽의 정신과 삶을 즐기고 있다. 모두 ‘절벽일여’(絶壁一如), ‘절벽동체’(絶壁同體)다. 죽음(절벽) 앞에서 죽음(절벽)을 선택할밖에, 달리 선택할 무엇이 있겠는가. 그 용맹과 결의가 바로 우리네 삶이다. ‘사즉필생’(死卽必生)이다. 송운유정 선사는 그 절벽 끝에서 취모검을 찾아내고, 그 취모검에 ‘다시 한 번 자신을 더 베야’(용맹정진) ‘진짜 삶’을 살 수 있다고 낭떠러지 아래로 우리를 내몬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몽중일여 오매불이’(夢中一如 寤寐不二). ‘진짜 삶’을 위한 납자(衲子)들의 칼날 익는 소리가 오늘도 곳곳에서 들린다. 끝까지 참구하고 참구해 열락을 성취하길 바란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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