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석한 하상연 선생과 하동의 고려다원 2

초의 부초 배건차 제조법 복원
스테인레스 가마솥 세계에 공개

석한 하상연 선생
석한 하상연 선생

 

석한 선생은 차()를 말할때 논자의 대부분이 기호식품이라고 하지만, 선생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차는 상고시대부터 생존 필수 식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차를 상식으로 하여 살아왔으며, 특히 조상 제사를 모실 때, 차례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차의 기능이 식중독을 풀고 피를 맑게 하고 소화를 촉진시키며 오장육부를 튼튼히 한다는 것은 기마민족인 우리 뿐아니라 세계 인류의 공해로 인한 각종 불치 난치병에서 헤어날 수 있는 구명식품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우리차 즉 초의 부초차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근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비교하여 토양과 기후조건이 좋기 때문에 차원료의 성분이 월등하게 우수하며 또한 부초배건(釜炒焙乾)하는 제차법이 치밀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극열(極熱)의 가마솥에서 익히고, 여러 차례의 불기운으로 숙성시켜 마르게 한, 즉 배건(焙乾), 우리나라 전통차의 그 향기와 색깔과 맛은 지구상의 어떤 차도 따를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제다장인들을 만날 때 이구동성으로 자주 듣는 이야기인데 이미 40여 년 전에 석한 선생이 지적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고려다원에 걸린 액자 가운데에 火烈香淸이란 말이 있다. 초의선사의 다신전에 나오는 말로, 차를 덖을 때 불기운이 강하므로 차의 향기가 맑다는 이야기다. 세계 수많은 나라 가운데 각 나라와 지역 및 제차에 종사하는 업체와 개인은 각기 자기의 제차법에 의하여 특색있는 차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부초차(釜炒茶)의 경우 가마솥 열기가 몇 도에서 처음 차잎을 넣어 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대 과학적 계량기기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온도기가 없었으므로 다신전을 비롯한 고문헌에는 정확한 기준온도가 없었다. 탄닌이 용해되는 온도가 섭씨 183도라는 것을 알아낸 석한 선생은 220도까지 올라가는 온도기가 붙은 전기남비를 사서 시험하여 185도에서 190도 사이에서 덖으니 잘 익고 200도가 넘으면 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기계제작공장에 가서 상의하여 이중으로 된 가마솥을 만들었다. 즉 안쪽은 스테인레스로 하고 바깥쪽은 무쇠로 한 진충제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가마솥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초의 부초 배건차의 제조법을 석한 선생은 나름대로 복원하였다. 이후 선생이 고안한 스테인레스제 솥은 우리 차의 우수성을 확인 받고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자 공개됐다.

대담 중인 하서룡 대표(왼쪽)
대담 중인 하서룡 대표(왼쪽)

 

중국의 용정차(龍井茶), 일본의 우치차(宇治茶) 등이 국제 시장에서 비싸게 거래되고 있는 데 비하여 우리 차는 색향미에서 그들보다 월등하게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국제무대로의 진출이 막혀 있다. 우리 차를 일본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좋은 차를 망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제차업계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일본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중소 제차 공장 및 심지어 가내수제차까지도 일본식 제법을 무의식중에 따르게 되고 빛깔, 향기 그리고 맛도 일본차에 준거를 두는, 밥 팔아 똥 사 먹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다()문화를 진흥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일본다도(日本茶道)를 공공연하게 보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람의 목을 베는 기술을 검도, 사람을 넘어뜨리는 기술을 유도, 차마시는 습관을 차도라고 과장하는 왜도인(倭島人)! 그들이 얄팍한 기예(技藝)를 일러 도()라고 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나, 이에 부화뇌동하는 우리 동포 중에 얼빠진 이들에게는 민족 자주성을 일깨워 주어야 하지 않을까?”

 

정민·유동훈은 한국의 다서(2000, 김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은 한국 떡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정작 우리는 이러한 빛나는 떡차 전통과 정체성을 까맣게 잊고 1970년대에 오히려 일본의 다도를 수입해, 이를 통해 한국 다도에 허상을 덧씌우려 애써왔다. 차 문화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수록 정체성은 도리어 흔들리고, 논의가 제자리 걸음에 머물고 만 이유다. 왜색 다도 논란은 지금도 불식되지 않고, 충실한 학문적 논의가 사라진 전공 지대에 각종 해괴한 찻자리 퍼포먼스만 법석을 떨어, 결국 차를 대중과 유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수많은 차 단체가 난립하고, 저마다 자신들만이 정통이라거나, 자신이 만드는 차만 전통 제다의 원형이라고 우긴다. 1980년대 대단했던 차 문화에 대한 열기는 싸늘히 식은 지 오래다. 그나마 커피에 밀려 차는 완전히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차는 기호식품일 뿐 여기에 만고불변의 원형이 있을 리 없다. 차는 마시는 사람의 기호를 반영해 계속 진화하고 변화한다. 그렇다 해도 이 땅에서 오랫동안 우리 선조들이 차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차를 만들고 마셔왔는지에 관련된 탐구는 계속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차 문화의 끝 모를 침체에 대한 해답은 어차피 이 속에 들어 있을 테니까 밀이다.”

 

고려다원 내부 모습
고려다원 내부 모습

 

이와 같은 우리 차문화의 현황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앞서 소개한 석한 선생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로 지금도 그렇지만 1979년 당시에는 더욱 지적하기 어려웠던 점을 고려해 보면 석한 하상연 선생의 의기는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차문화 운동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하도겸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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