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아
그 옛 스승아"

불교의 매력은
축제되 향락이지 않고
들뜨되 방탕하지 않는 것
임인년 하안거 잘 나
모두 活人劍이 되길

 

올 ‘부처님오신날’은 그 어느 해보다 성대했다. 코로나19로 3년 만에 열린 연등회는 온 국민 축제였다. 3년 만에 서울 밤하늘을 물들인 연등행렬은 시민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이튿날 서울 조계사 앞길에서 열린 불교전통문화마당은 국경과 종교를 뛰어넘는 세계인의 한국전통문화체험 자리였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불교는 다시 적막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임인년 하안거가 시작된 것이다.

불교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고요가 있어 축제는 향락이 되지 않고, 적멸이 있어 들뜸은 방탕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안거 결재 날, 필자도 마음의 하안거에 들어갔다, 취모검(吹毛劒)과 함께. 그 취모검은 우리 불교가, 우리 불교인들이, 그리고 우리 중생들이 어떻게 작금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그윽이 일러주고 있었다. 그 취모검은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선사의 선시였다.

“석 자 취모검을/ 오랫동안 북두에 감춰두었다./ 허공의 구름 다 흩어지자/ 그 칼끝 비로소 드러났다.[三尺吹毛劍(삼척취모검) 多年北斗藏(다년북두장) 太虛雲散盡(태허운산진) 始得露鋒鋩(시득로봉망)]”

취모검은 ‘바람에 날린 터럭도 자를 만큼 매우 날카로운 칼'을 말한다. ‘반야’(般若. 지혜)를 뜻하는 불가(佛家)의 은유다. 문제는, 그 날카로운 칼을 어떻게 쓰느냐이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칼은 주검이 될 수도 있고, 생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떠나, 근래 들어, 그 ‘칼’의 용처(用處)를 가장 선명히 안 사람은 김지하 시인이 아닐까 한다. 얼마 전 작고한 김지하 시인은 칼의 용처를 ‘미련’을 베어버리겠다고, ‘씻을 수 없는 죄’와 ‘지혜’로 바뀐 ‘배신’과 ‘서러운 사랑’으로 바뀐 ‘패륜’을 베어버리겠다고 명확히 밝혀놓았다. “미련의 베를/ 오늘은 끊으리라/ …… / 죽음으로밖에는 죽음으로밖에는/ 씻을 수 없는 죄도 한줄기 눈물로 씻겨내려/ 배신이 지혜로 패륜이/ 서러운 사랑으로 바뀌는 미련의/ ……… / 미련의 베를/ 끊어/ 알 수 없는 거리로, 먼 벌판으로/ 아픈 저 허공으로 오늘은 떠나리라”,라고. 그러면서 그는 그 칼을, “칼아/ 모진 그 옛 스승아”(이상 김지하의 <칼아> 일부)라며, ‘옛 스승’이라고 명명했다.

김지하 시인이 ‘칼’을 '스승’이라고 한 이유는 자명하다. 김지하 시인은 그 칼이 취모검이었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취모검으로 자신이 인간세에서 견뎌온 온갖 수모와 고뇌와 고통의 질곡을 단호히 끊어낸 것이다. 주검의 창살 안에서 시인 김지하가 찾아낸 유일한 생존법이기도 했다. 그 취모검 덕분에 김지하 시인은 감옥 안에서도 모든 구속과 속박을 끊어내고 자유와 해방(해탈)을 맛보았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취모검의 위대한 위력이다.

놀라운 것은 그 취모검의 정처(定處)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다 자신의 마음속에 취모검 한 자루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관일선 선사는 그것을 북두성이라고 교묘히 선동하고 있다. 그리고 허공에 구름만 흩어지면 그 북두성에 숨겨둔 취모검이 반짝반짝 칼날을 드러낼 것이라고 이르고 있다. 누구나 마음 구름만 걷어내면 바로 반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 모두 그 칼날을 다시 갈고 닦아야 할 시간이다. 들뜸에서 고요로, 축제에서 적멸로 다시 들어가 취모검을 벼려야 할 시간이다. 벼리지 않고 놔두면 녹 쓸고, 녹 쓴 칼날은 짚단은커녕 지푸라기도 베어낼 수 없다. 임인년 하안거 100일 동안 부지런히 벼리고 벼려 그 칼날이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활인검(活人劍)이 되길 바란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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