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은 (스스로) 보이지 않고 듣는 것은 들리지 않으며 냄새 맡는 것은 냄새 맡아지지 않고 맛보는 것은 맛보여지지 않으며 감촉을 느끼는 것은 감촉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은 인식되거나 생각, 감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모양소리냄새맛감촉법[추상적인 것(事)과 구체적인 것(物), Truth(일체 제법들)와 Thing(온갖 기호언어이미지,관념물상들)]은 육근의 경로를 통해 육식의 모니터에 오감(감각), 느낌(감수감정), 생각(표상), 의지(행위), 인식(지각)의 홀로그램을 구현해내지만, 이 모든 것을 견문각지(見聞覺知)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케 할 뿐 아니라 사시사철을 운행(四時行焉)하고 만물을 생동(百物生焉)케 하는 순수의식은 ‘자각’ 자체이어서 대상이 되지 못하고 대상이 되지 못하므로 절대 주관이다. 주관과 객관은 언제나 같이 생기고 같이 사라진다.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자도 없고 보이는 자가 없으면 보는 자도 없다.

「프리쵸프 카프라」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분석하던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한 것을 발견했다”라고 언급했다. ‘불확정성 원리’를 제창한 「하이젠베르크」도 “관찰자가 없으면 현상도 없다”고 단언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그것이 있고 그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고 그것이 없으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다는 것이 현상계의 연기법이다. 만물의 이름이 붙기 전에 하늘과 땅도 그렇게 생겨나지 않았을까? 유(有)와 무(無)가 상생, 연기하여 천지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만물이 생육화성(生育化成) 되어 생노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거듭한다. 없는 것이 있어 있는 것이 있고, 있는 것이 있어 없는 것이 보인다. 없는 것이 없으면 있을 것도 없다. 있으므로 없는 것도 있다.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몸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그림자라는 허상은 몸체의 춤이다. 가짜는 진짜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므로 가짜를 통해 진짜를 통찰하는 것이다.

천지 만물이 법신의 아바타이자 화신이므로 존재 자체가 깨달음이다. 법신이 아닌 현상은 하나도 없다. 꿈속의 것은 먼지 한 톨도 꿈속의 것이다. 꿈 밖에는 꿈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수화풍 사대의 허망한 몸이 불멸의 법신이고 번뇌가 보리인 이치이며 ‘지금, 여기, 그대가’가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봄은 늘 여기에 와 있고 엄동설한에도 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를 타고(騎牛) 소를 찾는(覓牛) 중생도 아름답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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