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석한 하상연 선생과 하동의 고려다원 1

‘정통 가마솥 덖음차 만들기’ 계승
유파 폐쇄성과 비밀주의 해악 지적

우전을 만들고 있는 하서룡 대표.
우전을 만들고 있는 하서룡 대표.

 

“화개동천”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지역의 옛말이다. ‘별유천’이나 ‘무릉도원’ 등으로도 불렸던 하동은 우리 산하의 척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끝자락인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다. 칼슘, 칼륨, 망간, 마그네슘, 아연, 셀레늄 등 인체에 유익한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된 고생대 토양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섬진강은 남해와 맞닿아 있으며, 차가 나는 봄철의 지리산 계곡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과도한 햇볕을 막아주고, 온도와 습도등 차나무 생장에 있어서 최적의 기후조건을 만들어 준다.

특히 화개계곡은 섬진강과 화개천이 합수되는 곳으로 아침에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나고, 고생대 지층이 오랜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마사토 위에 부식토가 덮혀 있어, 차나무가 자라는데 적합한 토양을 갖추고 있다. 또한 한겨울에도 눈이 쌓이지 않고, 해동이 빠르며, 서리가 늦고, 강수량이 연간 1,500mm가 넘는 기후조건을 갖춘 화개동천은 차나무가 군락(群落)을 이룰 수 있는 최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화개는 옛부터 차의 자생지로 유명하다. 우리 차의 중흥조인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지리산 화개동은 차나무가 사오십리에 걸쳐 자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차밭으로는 이곳이 가장 넓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고운 최치원은 그의 시에서 화개의 아름다움을 “항아리 속의 별천지(壺中別天)”로 표현하였다.

화개 사람들에게 차는 고려인삼과 더불어 우리나라 식약자원의 쌍벽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했던 터널을 지나서 해방을 맞은 우리민족은 민족분단기 동안에 외래식품문화가 범람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전통식품 문화는 급속히 위축되었다. 더욱이 우리의 차 산업과 차 문화는 거의 멸절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다원 하서룡 대표의 부친인 석한(이산 또는 다농) 하상연 선생은 1960년 3, 4월 민족항쟁을 전후하여 산수 이종률 선생의 문하생들이 주축이 된 민주민족청년동맹과 민족혁명운동의 전선체인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등에서 중추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정변이후 선생은 투옥과 압제 속에서도 일체의 굴종과 타협 없이, 인혁당 사건과 민자통 재건운동 등을 통하여 민족민주운동을 실천 하였다. 선생은 고향인 하동에서 은거하면서 밤나무 조림과 은어 양식 등을 통하여 자주적인 농촌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힘써 왔다. 또한 선생은 차나무 심기와 우리의 정통 가마솥 덖음차 만들기를 통하여 우리 차산업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닦아 놓은 분 가운데 한분이다.

석한 선생이 고려다원의 문을 열던 1979년 당시의 우리 차 산업은 사원 주변의 사원차와 남도의 몇몇 다인들에 의해서 겨우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선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먼저, 진주와 서부 경남지역에 연고를 둔 자비차(데쳐서 만든 차) 계열의 효당류와 광주호남지역의 의재류(毅薺-허백련)가 있는데, 최범술류의 자비차는 다솔사를 중심으로 만들어 졌던 독특한 차였다. 의재류의 춘설차는 훗날 보성차와 ‘설록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화개지역에는 몇몇 소규모의 차생산 농가가 남아 있어서,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화개차는 초의제다법에 기반을 둔 가마솥 덖음차로 발전하게 되었다.... 허나 각 유파들은 지역성과 편향성을 극복하지 목하고 폐쇄성과 비밀주의로 일관함으로써 우리 차산업 발전에 끼친 해악도 적지 않다. 이에 필자는 WTO 가입이후 급격히 달라진 우리의 경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차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모든 차생산자들과 다인들이 떨쳐 일어나 차산업과 차문화의 전반에 걸쳐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진작시키고, 그 속에서 교류하고 협력하여 우리의 차산업과 문화를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선생은 초의 제다법의 근본은 열초(熱炒)와 배건(焙乾)이라고 하였다. 열초는 뜨거운 솥에서 첫덖음을 제대로 하는 것이고, 배건은 비빈 차잎을 다시 덖어 차의 향미를 부드럽게 하는 일이다. 그 내용은 선사가 등초한 『다신전』에 있는데, 이는 당시까지 정립된 중국 제다법의 정수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 지금까지 남아있는 초의 제다법은 『다신전』의 제다법과 모두 일치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중국의 제다법에는 전무한 ‘온돌방 건조’ 등이 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 선조는 우리의 차잎에 적합한 제다법을 계속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초의제다법은 간단명료하나 여기에 우리 전통차 제조법의 특징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즉 가마솥에 불기운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차 잎을 솥에 넣어 손놀림을 빨리하여 덖는 다. 이때에 불기운을 낮추지 않으며 뜨거운 솥 안에서 차 잎이 충분히 익혀서 꺼내어 멍석에 털어놓고 부비는 것을 거듭한다. 차의 형태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면 다시 솥 안에 넣고 불기운을 점차로 낮추어서 차 잎의 수분을 제거하는 배건을 적당히 헤아려 행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초의조차법 이전에는 “센잎(老葉)을 따서 햇볕에 말려 국 끓이듯이 솥에 넣어 삶으니 색은 짙고 탁하며 맛은 심히 쓰고 떫어 천하에 좋은 차가 속된 인간들의 손에 의하여 버려지게 된다”라고 『동다송』에 기록된 바 있다. 석한 선생의 차론은 다음 편에 계속 된다.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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