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삶은 관념이 아닌
실천과 나눔의 삶
불교는 관념적 깨달음 아닌
사바적 삶의 가르침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 위해
연등 밝혀주는 것도
붓다로 살아가는 것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생각하는 명제가 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붓다처럼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붓다로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붓다같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깨달음과 진리만 추구하며 관념적으로 사는 것이 붓다 같은 삶인가, 아니면 ‘낡은 수레바퀴’[노구(老軀)]가 되도록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몸으로 헌신하고 자비를 행하며 실천적으로 사는 것이 붓다 같은 삶인가.

얼마 전, 가슴 아픈 사연 하나가 가슴을 적시고 지나갔다. 지난 4월 2일 경상남도 창원에 사는 이미선(44)씨가 폐와 양측 신장, 좌우 각막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기증원에 따르면 이 씨는 3월 28일 새벽 갑작스럽게 몸 상태가 나빠져 창원파티마병원으로 이송됐고,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뇌출혈로 인한 뇌사상태가 되었다.

간호사로 근무해온 이 씨는 평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고, 밝고 친절한 성격으로 지인들을 살뜰히 챙겨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두 자녀에게는 친구 같은 엄마기도 했다. ​이 씨의 남편 이승철(45세) 씨는 “아내는 생전에 장기기증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름처럼 선한 성품을 고려하여 가족들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장기기증을 결심하게 됐다”며 “두 아이들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는 힘들겠지만, 엄마의 장기기증을 통해 아픈 사람에게 새 삶을 줘 우리 곁에 다른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고 세상에서 두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 씨와 그 가족의 종교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비교가 잘 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 씨의 안타까운 죽음과 나눔 속에서 불교적 삶의 한 단면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코 불교적 삶이었다. 붓다의 이타(利他)적 삶이였다. 80 노구(老軀)가 되어서도 온몸으로, 끝까지, 헌신적으로 자비의 ‘수레바퀴’를 굴리시던 붓다의 실천적 삶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불교의 화엄(華嚴)은 관념적 깨달음과 진리의 추구에만 있지 않다. 불교의 화엄은 오히려 붓다의 실천적 삶과 그것을 실천하고 사는 우리들의 사바적 삶에 있다.

성도(成道) 후, 붓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붓다는 자비와 이타를 바탕으로 한평생 실천적 ‘전사(戰士)’의 삶을 살았다. 당시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던 카스트(caste, 사람의 신분을 네 계급으로 나눈 인도의 사성제제도)를 혁파하고, 인도 사회(인간사회)에 평등과 정의와 자유와 공정을 실현코자 철저한 실천적 삶을 산 사회개혁운동가였다.

붓다는 인간의 오욕[五慾, 재⦁색⦁식⦁수⦁명((財色食睡名)]을 가장 큰 마군(魔軍)으로 여겼다. 그리고 동체 대비의 자비와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법륜(法輪)을 굴려 사회적 약자와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 부정의와 불공정, 불평등과 폭력 등 온갖 ‘마군에 분연히 맞서 이겼다’[降魔]. 그런 붓다 앞에 빈부와 노소⦁남녀⦁신분⦁권력 등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붓다는 빔비사라와 빠세나디 국왕 같은 권력자들과도 잘 어울렸다. 아나타삔디까 같은 부유한 자본가들과도 잘 어울렸고, 위사까⦁케마⦁웁빨라완나 같은 귀부인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붓다는 앙굴리말라 같은 살인자와 수니따 같은 청소부, 암바빨리⦁빠따짜라⦁순다리 같은 창녀들도 제자로 받아들이고 포용했다. 권력과 재물과 신분의 높낮이가 붓다에겐 어떤 장애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이 붓다 같은 삶이 되지 못하고, 불교적 삶이 되지 못하는 것은 갈애(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우프레티는 설파했다. “갈애(욕망)는, 그것이 이기적 자기중심주의를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개인을 자신의 이익, 또는 자신의 주장에 의해 유발되는 행위로 몰아넣는 만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이기주의일지라도 사람을 마라(마군)의 속박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라고.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필자부터 각성해본다. 나는 과연 붓다의 삶을 잘 살고 있는가. 불교를 찾는 우리 불교는 이웃과 국가와 국민과 동포와 인류를 위해 과연 붓다의 삶을 잘 실천하고 있는가. 이타와 자비를 잘 실행하고 있는가. 부처님오신날이 되자 그동안 코로나19로 잘 찾지 못했던 산사에 와 연등을 다는 불자들이 많아졌다. 가족 생축등도 켜고 영가등도 켠다. 켜는 김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숨진 영령들과 미얀마의 군부탄압으로 숨진 영가들을 위해, 그리고 이 씨처럼 이타적으로 살다 숨진 사람들을 위해 연등 한 밝혀주는 것은 어떨까. 살아 있는 붓다가 사려가는 시대, 어쩌면 그것이 붓다로 사는 길이고, 붓다의 삶이 관념의 삶이 아니라 실천의 삶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 아닐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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