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쯤의 초여름, 경남의 한 바닷가 산자락에 위치한 한 사찰을 방문했을 때의 목격담이다.
주지 스님과 우리 일행이 점심상을 막 받고 있는데, 한 노보살님이 굽은 허리를 받쳐들고 대청마루에 들어섰다. “아이고, 숨 넘어가겠네. 스님, 안녕하셨지요?” 가쁜 숨을 헐떡이며 겨우 인사를 마치고 공양간 쪽으로 가려던 참이다. 젊은 총무 스님이 노보살님을 막아세웠다.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께 인사부터 하고 오셔야지요.”
그런데 주지 스님이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썩 짐 싸서 나가거라.” 일순간 정적이 감쌌다. 노보살님은 어찌할 줄 몰라 엉거주춤 서 있고, 우리는 들었던 수저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주지 스님과 총무 스님, 노보살님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공양을 마친 후 주지 스님에게 왜 화를 내셨냐고 물었다. 주지 스님은 오래도록 어린이포교를 하셨다. 어린이포교단체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웃을 때는 영락없는 천진동자다. 그런 스님이 버럭 큰소리를 내질렀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 스님은 두 손을 모으고는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라면서 연유를 설명했다. “배고픈 사람에겐 밥이 먼저고, 목마른 이에겐 물부터 마시게 해야지요.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절에 가면 가장 먼저 법당에 들러 부처님상을 향해 삼배를 하는 것이 불자의 몸가짐이다. 초심자에게 기초예절로 가르치고 있다. 친구집에 갔을 때 그 집의 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총무 스님의 말이 그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주지 스님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전을 찾아보았다. 법구경에 ‘배고픈 농부의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부처님께서 알라위의 가난한 농부가 수다원과를 성취할 인연이 무르익었다는 것을 아시고 비구들과 함께 먼 길을 걸어 그리로 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려 모였다. 부처님은 농부가 온 후에 법문을 시작하겠다고 하셨다. 하루 종일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맸던 농부가 뒤늦게 도착했다. 부처님은 그에게 음식을 갖다주라고 하셨다. 농부는 식사를 해서 배고픔이라는 괴로움이 사라지자 마음이 고요해졌다. 법문을 들은 농부는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비구들이 가난한 농부에게 음식을 갖다주라고 한 것에 대해 불평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법문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음식을 갖다주라고 말한 것이다. 이 세상에 배고픔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주셨다. “배고픔이 가장 큰 병이요/형성들이 가장 큰 괴로움이다./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면/최고의 행복인 열반에 도달한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고 마시게 하여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배고픔은 고통이다. 배고픔은 병을 들이게 하며,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기도 한다. 배고픔을 확장하면 빈곤이다. 빈곤은 게으름이 아니라 자비가 없는 데서 생겨나며, 전쟁과 강도짓과 도둑질을 불러들이는 인연으로도 작용한다. ‘사흘 굶어 아니 날 생각 없다’거나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도 이런 까닭에서 생겨났다. 맹자도 항산(恒産)이면 항심(恒心), 즉 안정된 수입이 있어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일렀다. 안정된 마음이 없으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사악하고, 사치한 짓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최서해의 단편소설 <큰물 진 뒤>에서는 배고픔이 결국 남의 집 담을 넘는 상황을 긴장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아내가 해산을 하던 날 홍수가 들이닥친다. 산모와 갓 태어난 핏덩이에게 먹일 것이 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굶어죽을 지경이다. 공사판을 찾았지만 쫓겨난다. 윤호는 달 없는 밤을 기다려 부잣집 담을 넘고야 만다. 시퍼런 칼을 이 주사의 목에 겨눴다.

법보다 밥이 우선이다. 자비 없는 법은 없다.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