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사후부터 데카르트 이전 서양철학은 대체적으로 신의 피조물인 인식주체(인간)가 고정된 실체가 있는 인식 대상(우주)을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모사’하는 것이 세계라고 사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이 창조한 우주에서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우주와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세계인 것이다.이른바 뉴턴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이라고 하지만 육안으로 세계를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데카르트에 와서 인식주체의 주관성, 즉 본유관념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식 대상은 여전히 실체를 가지고 그 자리에 독립된 객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믿었다(부파불교의 논리 전개와 비슷한 것 같다). 칸트가 이 세계는 ‘마음에서 각색된 세계’라는 것을 통찰하기 시작하면서 인식주체(관찰자)는 중시되었고, 인식주체의 선험적 상태(경험 이전의 실재)에 따라 인식 대상은 각자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파리가 인식한 우주와 토끼가 인식한 우주, 인간이 인식한 우주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인식 대상의 본질인 물자체(物自體)는 불가지(agnosticism)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유식학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헤겔과 쇼펜하우어에 이르러서야 궁극적 이데아인 소크라테스의 ‘다이몬(불성)의 목소리’가 재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유기체 철학의 대가 화이트헤드는 형이상학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플라톤 이래 강력하게 지속되어 왔던 ‘실체중심적 존재론’을 ‘생성과 과정의 존재론’으로 변화시켰다. ‘실체론’에서 ‘(연기적) 관계론’으로의 획기적 전환으로 이해된다.

초기불교 시대와 부파불교의 관점에서는 현상계가 무상 고, 무아라는 세계관이므로 한시라도 빨리 현상계를 벗어난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본질적 세계의 표현이 곧 현상계라는 대 긍정의 꽃을 피운 것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였으며 그에 대한 주석이 중관과 유식이다. 서양철학의 원류가 궁극적 이데아 세계의 로고스인 진선미를 지향했던 것처럼 대승불교의 정화는 실상계의 로고스인 육바라밀을 현상계에 구현하는 것이다. 실상계의 현현이 곧 현상계이고, 불성(佛性)의 화신이 중생(衆生)이며, 전체가 응축된 것이 개체이므로 인간은 그 본질의 프로그램(본성)대로 살아야만 평온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태양 없이는 달빛도 없으며 무위법 없이 유위법도 없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바라밀은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법륜이다. 그래서, 제악막작(諸惡莫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악을 삼가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일들을 정성껏 행하여), 자정기심(自淨其心, 본래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 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모토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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