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까무니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딪힌 딜레마는 사실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 딜레마에 대한 질문을 거칠게 정리해 보면, ①세상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②세계(우주)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 ③영혼의 존재 여부, ④부처님이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지 여부이다. 질문내용을 분석해 보면 ①과 ②는 우주와 존재론, ③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의문, ④는 윤회론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널리 알려진 ‘독화살’의 비유와 함께 “그것은(그런 질문은) 이치에 맞지 않고, 법에 맞지 않으며,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깨달음과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라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거부하고 제자들에게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사라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가르치신다. 왜 그랬을까? 제자들이 토끼의 뿔과 거북이의 털처럼 실재하지 않는 사실을 기초로 질문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실재하지 않는 토끼의 뿔과 거북이의 털이 영원한지, 한계가 있는 것이지, 환생하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눈앞에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의미가 있다. 이 몸과 수상행식의 오온을 나와 동일시하면 위의 질문 항목들은 숙고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기계론적 우주에서 육신으로 태어나 살다가 병들어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성적적(惺惺寂寂)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여여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실재를 진실한 나라고 자각하면 우주는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이다. 여여한 마음밖에는 실재하는 어떤 것도 없으므로 환생과 윤회의 실체도 없다. 공(空) 중에는 오온도 십팔계도 십이연기도 사성제도 없다고 반야심경은 강조한다.

무위법은 유위법의 근거이자 바탕이고 유위법은 무위법의 나툼이자 의미이다. 유무(有無)가 상생이고 용사(龍蛇)가 동거이다. 하나이면서 상호 의존적이다. 공(空)이 곧 색(色)이며 색(色)이 곧 공(空)이다. 현상계는 실상계의 표현이므로 파도가 바다이듯 현상계가 곧 실상계인 것이다. 온 우주가 마음속으로 들어오므로 너와 나의 적대적 이분법은 없다. 부처님 제자들의 의문도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의 문을 열고 들어가 거기에 안주해버리면 세상이 영원히 존재하는지, 우주의 끝이 있는지, 환생과 윤회가 있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과학적으로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오온이 내가 아닐진대 의문의 주체가 존재하기는 한가? 의문의 주체 자체가 생각이라는 기능일 뿐이지 않을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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