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며

각기 다른 불두.
각기 다른 불두.

 

우리가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상과 불경은 지금의 파키스탄 간다라로부터 384년 처음 전래됐다. 간다라지역은 기원전 500년과 기원후 500년 동안 동서양의 문화문명을 융합시켜 황금기를 구가했던 제국이었다. 그 곳에서 처음 만들어진 불상과 불경은 동서양 문화문명을 함축적으로 상징했다. 불상과 대승불교는 이민족, 이교도를 통합하고 체제 안정의 안전판 역할의 구심점이었다. 국제질서의 도모도 불교라는 사상과 종교를 앞세워 체제 안정과 민심 통합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때문에 간다라와 간다라 불교의 이해 없이는 한국불교를 알 수 없다. 간다라지역의 대승불교와 불상을 처음으로 백제에 전한 스님은 간다라 출신 마라난타 스님이다. ‘불상의 나라 간다라지역’ 출신인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 침류왕 원년인 384년 9월께 왕사로 오면서 백제 불교와 일본 불교의 씨를 심었기 때문이다. 중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중국의 불교경전에도 간다라는 스님들의 고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전해진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도 간다라 대승경전을 중국 현장 스님이 중국말로 번역한 것이다. 중국 고승전은 간다라지역을 최고의 불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특히 스님들의 성지 순례 최종 목적은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간다라 유적을 보고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간다라는 중국에 불교를 전파한 스님들의 본고장이라는 뜻이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고 불경을 번역한 대부분의 스님들이 거의 간다라에서 왔다.

고대 간다라지역, 지금의 파키스탄은 불교가 출현하기 전 베다교를 믿고 있었다. 베다교에서는 신상을 만들어 그곳에 예배하는 것을 배척했다고 한다. 베다 경전인 『야주르베다』에는 “신의 이미지는 없다”라고 명문화돼 있다. 고대 간다라 사람들이 가졌던 이러한 신앙관에 따라 신상(神像)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간다라에서 처음 불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불상을 처음 조성한 쿠샨제국 4대 황제인 카니시카 왕(78~144년)은 원래 조로아스터교 신도였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와 문화가 다른 이민족과 함께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그들 신들의 초상을 대신해 불교의 석가모니 부처님 상을 조성했다. 부처님의 전생과 일대기를 불탑과 사원으로 장엄해서 불교의 진리를 널리 전파했다. 카니시카 왕은 이를 통해 정신적으로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체제를 굳건히 하면서 왕의 신격화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불상(佛像)은 신의 모습을 사람의 영역으로 환생시킨 상징

라호르 박물관 소장 부처님 좌상.
라호르 박물관 소장 부처님 좌상.

 

카니시카 왕은 바로 그곳 간다라에서 불상(佛像)을 통해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일이 우선이지 불상을 조성해 경배하지 않았다. 카니시카 왕이 불교로 개종 전 믿었던 조로아스터교는 사람이 죽은 후 극락과 지옥에 가는 문제를 심판할 때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광명세계로 갈 수 있는 희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사후세계에 대해 매우 불안해했다. 불상과 대승불교를 수용하면서 조로아스터교에서 모시는 빛의 신은 불교와 만나 점차 영원한 광명의 ‘아미타불’이 되었고, 모든 사람을 구하는 페르시아 사막의 물의 여신 아나히타는 자비심 넘치는 ‘관세음보살’이 되었다. 태양신 마트라는 세지보살이 되어 점차 삼위 일체적 사고로 불교의 ‘아미타 삼존불’로 등장한다. 이때 중국은 로마에서 포도주를 수입하여 마셨던 포도주 빈 원통형 질기에 약초를 담아 인도와 페르시아에 역수출하여 팔았다. 이것을 간다라지역에서는 동방에 병을 고치는 부처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동방의 ‘약사여래’가 등장한다. 이 같은 기원이 서린 불상과 불법 등 성물(聖物)을 백제에 전한 마라난타 스님은 백제 그리고 훗날 일본의 정신개벽(精神開闢)을 연 분이었다. 중국 불교도 간다라로부터 유입됐고, 한국 불교의 뿌리도 간다라라는 점에서 불상의 출현은 당시나 지금이나 신앙과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깨달음의 실체를 불상을 통해 현실화하려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불상은 시대와 나라마다 표현하는 방법도 각기 달랐다.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토착 신앙과의 대척점이 아닌 화합을 도모하려는 시도가 불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간다라 불교문화를 오랫동안 연구한 민희식 박사에 따르면 간다라지역에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영향이 있기 전 약 500년간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적멸 후 500년이 지나 부처님이라는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불상이 출현했다. 그 불상이 간다라 문화문명을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그곳에서 처음 불상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당시는 인간이 계속 생로병사를 되풀이한다는 윤회사상이 강했고, 우주 생성의 일부로서 중생의 삶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일이 우선이지 불상을 조성하여 경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소카왕(B.C. 273-B.C.232년)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불교에 귀의한 다음 쿠샨왕조 카니시카왕 때 불상이 처음 등장한다. 이 때 불상과 함께 부처님 전기나 경전도 결집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불교 조각이 탄생하게 됐다는 기록이다. 불상과 불경 등 성스러운 보물인 성물(聖物)이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그리고 한국 등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사에서 특기할 점은 이교도와의 화합과 소통을 통해 이교도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발행한 은화나 금화를 보면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불(火)이나 신, 그리고 다른 종교의 신들을 불상과 함께 앞뒤 면으로 새겼다. 여기에서 대승불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불경과 함께 8만4천 개의 불상과 불탑을 세우는 원을 세우고 실제 조성했다고 한다. 세계에서 단일지역에 불상과 불탑이 가장 많은 곳이 간다라지역이다. 그 불상과 불탑을 보면 로마계, 이란계 유목민, 인도 힌두 양식을 다양하게 가미한 흔적들이 보인다. 초기에는 부처님의 전생도를 묘사하는 불상이 주류를 이루다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현생과 내생까지를 표현하는 불상이 출현했다.

조각상.
조각상.

 

카니시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후에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님들간 서로 다른 경전해석으로 혼란을 겼었다. 이에 캐시미르에서 제4차 결집을 통해 종파간 불경 해석을 통합하고 화합 차원에서 대승불교가 등장했다. 카니시카 왕은 이와 함께 다양한 민족과 종교 및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교를 수용하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 신들의 초상을 대신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다양하게 조성했다는 해석이다.

불상과 불화는 깨달음의 또 다른 상징 영기화생(靈氣化生)

불상과 불화는 신의 형상을 인간의 이미지로 대변한 만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고려와 조선시대 남겨진 불상과 불화에서 보이는 보살의 얼굴에서 방광하는 기운을 형상화한 것도 바로 깨달음에 이른 신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불상에서 보이는 일체의 조형들 속의 각기 다른 수많은 무늬는 영기문(靈氣文)이라고 이화여대 강우방 초빙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깨달은 수행자를 여러 형태로 표현한 것이 불상이라는 것이다. 그 불상과 불화에 표현된 코밑수염과 턱수염들도 모두가 제1영기싹 영기문의 또 다른 표현이고, 그 밖의 모든 털을 영화시켰다는 것이다. 간다라 지역 페샤와르 박물관에 소장 중인 2~3세기에 나타난 석가모니 불상의 머리카락 형태도 두상속발형, 파상발형, 눌린 파상발형, 둥근 나발형, 나발형 등이다. 이 형태는 멋 내기 위한 것이 아닌 깨달음의 또 다른 여러 상징을 담고 있다는 설이다. 강우방 교수의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에 대해 파키스탄 현지 간다라지역의 간다라문화예술협회 사무총장이자 전 파키스탄 국립파키마진나 여자대학교 초빙교수는 “간다라 불상과 불화를 접해볼수록 영기화생론을 실감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박교순 박사는 “간다라에서 최초로 출현한 불상과 불화 등의 성물은 절대적 진리에 다다른 부처와 보살을 인간의 모습의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의 상징을 추상적, 구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론이 시대와 신심에 따라 각기 다른 불상과 불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시원이 간다라 불상과 불화이다.

-전 연합뉴스 기자 ㆍ ‘천년고찰 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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