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만나는 우리의 차
⓶ 남원 매월당 오동섭의 차 이야기Ⅰ

차계에서 ‘최초’란 ‘최고’의 의미
‘다성’ ‘다조’ 등 추존엔 신중한
역사적 평가와 조명이 수반돼야
매월당은 이 점에서 가장 주목돼

제다과정을 설명하는 오동섭 대표.
제다과정을 설명하는 오동섭 대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지은 『금오신화』안에 「만복사저포기」라는 소설이 있다. 최초의 한문소설이라고 하는데, 최초 치고는 구성도 탄탄하고 매우 재미있다. 매월당이 그 전에도 몇 편 습작을 썼든가 그 전에 다른 분의 좋은 소설도 읽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잠정적인 ‘최초’가 아닐까도 싶다. 그러니 ‘최초’라기 보다는 ‘최고’ 즉 남은 것 가운데 최초라는 수식어가 더 적절할 듯싶다.

이런 논쟁거리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 차계에서 ‘최초’라는 것이 사실 대부분 ‘최고’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나 싶어서이다. 첫 번째 즉 ‘최초’라는 말이 자칫하면 그 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왜곡’의 범주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고’라는 표현 역시 시대를 벗어나면 제일지상주의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차의 성인이니 선조이니 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 ‘다성(茶聖)’이나 ‘다조(茶祖)’니 하는 말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차의 성인이나 선조가 여럿이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비교적 늦은 시기라도 훌륭한 차인을 다성으로 추존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는 그 전후의 더 훌륭한 다른 분들의 업적을 깎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신중한 역사적 평가와 함께 새로운 차인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필요하다.

오늘 살펴볼 매월당 김시습이야말로 최근 차계에서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가장 ‘핫’한 위인이 아닌가 싶다. 매월당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켰던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저자거리의 기인으로도 알려진 매월당은 유불선 모두에 도가 튼 ‘도인’으로서, 그리고 차계에서는 작설(雀舌)과 용봉단차(龍鳳團茶)를 마셨던 ‘차인’으로서도 알려져 있다.

80여 수나 되는 많은 차시(茶詩)를 남긴 매월당은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 때, 일본 국왕사로 찾아 온 ‘준장로(俊長老)’란 스님을 만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어쩌면 한번 뿐인 이 만남 때문에 일본의 초암차(草庵茶)와 와비차가 탄생되었다는 견해도 나온 바 있다.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로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만남을 증빙하는 사료 한 두개만 남아 있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다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말할 수 있는 것만 밝혀보는 것은 어떨까? 역사는 신앙이나 소설과는 다른 과학의 범주에 보다 가까운 학문이라는 점을 차계에서도 이제 인정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도 싶다.

매월당 차실 모습.
매월당 차실 모습.

 

여하튼 떫은 맛을 덜하게 해 주는 빛 가림을 위한 차광(遮光) 재배, 일창일기(一槍一旗) 등의 “말린 속잎 하나에 펴진 잎의 하나”라는 차엽의 모양보다는 빛과 맛이 중요하다는 것 역시 김시습은 지적한다. 하지만 이 역시 소비나 끽다의 취향일 뿐이지 않나 싶다. ‘다시(茶詩)’ 즉 차에 대한 시가 있다고 ‘차인’은 아니다. ‘다시’가 없는 다인들도 적지 않다. ‘다시’가 있으면 ‘차인’이라고 하기 좋지만, 없다고 해서 차인이 아니라는 준거가 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아울러, ‘다시’가 많이 남아 있고 ‘차’에 깊은 관심이 있다고 해서 훌륭한 ‘차인’의 범주를 넘어서 굳이 제다와 관련된 ‘다성’이나 ‘다조’의 범주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초의 의순-추사 김정희 보다 약 350여년이나 앞선 매월당 김시습-점필재 김종직-한재 이목이라는 조선전기 또는 중기의 3인방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19세기 초가 우리 차문화의 전성기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지만, 그게 마치 시작인 것처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차문화사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된 남원 보련산 자락의 만학동 계곡에는 고려 시대 이래의 야생차 군락지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차나무의 수령 등을 보면 조선시대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것은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남원은 고려 말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 권13에 실린 「유차시」에서 극찬한 지리산 운봉에 사는 노규 선사의 조아차(早芽荼)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지금의 야생차의 근원이 고려시대일 개연성은 충분하다.

명나라 장군 양호가 선조대왕에게 품질이 탁월하다고 한 차가 남원에서 생산된 것이며, 남원의 차에 대해서는 조선전기에 간행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대렴이 가져온 차씨가 지리산에 심어졌고 남원도 지리산 자락이라는 점 등등의 근거로 그 개연성은 더욱 높아진다. 하지만 개연성이 높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로 정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역사는 취사선택이 아니라 충분한 사료로 검증되어야 하는 ‘사료비판’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차계에서 ‘시배지’ 등과 관련된 논쟁 자체가 대부분 차문화사 상의 정통성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구역상의 지역적 패권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한, 좀 더 유리하다는 이유로 해당 지자체나 관련 박람회 등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화심(和心)을 강조하는 차의 정신이나 다음의 매월당의 ‘산거집구(山居集句)’ 가운데 시상(詩想)과의 배치되는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오늘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작은 솥에 차 끓이며 굽은 연못 바라보네.
홀연히 고요 속에 삶의 의미가 동함을 기뻐하네.
산바람이 불어 계화가지를 꺾어 놓았네.
세간에선 안락을 청복으로 삼지만
난 차 달이며 평상에 앉았다네.

물론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정통성 논쟁이나 역사상의 유명한 차인의 지연 등과 관련된 논쟁이 모두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지역 차인이나 제다명인들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남원 보련사 터는 『만복사저포기』에 등장하는 양생과 하랑의 순애보가 그려진 곳이다. 때문에, 보련산의 야생차 군락지의 역사는 신라시대 늦어도 고려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산으로 너무 갔나보다. 차 만드는 신(神)목(木) 오동섭 대표의 ‘남원 매월당’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된다.

-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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