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라 불교 전래도.
간다라 불교 전래도.

 

쿠샨왕조 카니시카왕 통치시절인 간다라 지역에서 이민족과 이교도들을 불상을 통해 화합과 통합을 도모하는데 불상이 처음 등장했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다. 조로아스터교 신도였던 카니시카 왕이 불교로 개종하면서 본인 스스로 뿐만 아니라 이민족과 이교도 연합체 국가인 쿠샨왕조의 사상과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수단으로 그리스 조각 양식을 빌어 불상을 조성했다는 설이다. 초기 불교시절에는 부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은 불상불가론(佛像不可論)이었고, 부처님 열반후 500년 동안이나 불상이 없었다가 카니시카왕 때 처음으로 불상이 등장한 것은 이 같은 정치상황과 밀접한 인연에서 비롯됐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불상의 출현은 당시나 지금이나 신앙과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종교라는 실체를 불상을 통해 현실화하려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불상은 시대와 나라마다 표현하는 방법도 각기 달랐다.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토착 신앙과의 대척점이 아닌 화합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불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마라난타, 불상과 사찰건축 처음으로 백제에 소개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는 시점인 4세기경 유일하게 ‘불상의 나라 간다라지역’ 출신인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로 384년 9월께 온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라난타 스님은 당시 침류왕 원년에 백제 왕사로 왔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백제를 중심으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한 대치를 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삼한을 삼국이 각각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도 각기 내치 안정과 함께 국내외 외교전에도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때에 불교가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고행상.
고행상.

백제 왕실은 의술과 불법으로 이적을 보이고 있다는 중국 동진에서 건너 온 마라난타 스님을 왕사로 모신 것도 불교를 통해 국론을 통합하고 불법으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백제에도 토속신앙과 도교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각기 다른 점 때문에 국론통합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불교의 부흥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실이 도교를 대대적으로 지원하자 고구려 스님이 백제로 종교적 망명을 한 기록도 나올 정도이고 보면 삼국시대 초기에 사상을 통한 국론통합도 크나큰 과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이같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서 국제질서의 사상적 축을 갖춘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엿 볼 수 있다. 간다라지역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문화문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불교와 불상을 침류왕이 직접 받아들여 왕실로부터 점차 민간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를 위해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중국을 통하지 않고 불상의 본고장 출신인 마라난타 스님을 모신 것이다.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라난타 스님이 이적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외국 스님이라는 것부터가 특이한 대목이다. 두 기록에는 마라난타 스님을 동진에서 백제로 온 호승(외국 스님)이며 신묘한 이적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고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불사를 했다고 한다. 침류왕은 그를 때때로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공경했고, 마라난타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마치 왕의 명을 받고 몰려드는 것과 같았다고 소개했다.

이를 보면 백제 침류왕이 외국 스님을 왕사로 모신 것 자체로 백제의 대외개방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지금 같으면 거센 저항에 부딪힐 일이지만 백제는 한반도 뿐 아니라 중국 그리고 유럽지역까지 활발한 교역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상징이 바로 마라난타 스님이다.

삼국 불상 통해 민심 수습과 국론통일 도모

당시에는 없었던 불상이 마라난타 스님을 통해 처음 소개됐고 마라난타 스님은 본인이 처음 도착한 영광 법성포를 중심으로 불갑사를 창건했다. 또 백제 수도인 서울 우면동에 대성사 그리고 변방과 접경지역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기록을 보면 사찰과 불상을 통해 호국과 민심 통합을 꾀한 것이다.

영광 불갑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영광 불갑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385년 백제의 수도 한산주에 절을 지어서 승려 10인을 출가시켰다는 설과 함께 현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등 백제 유적에서 불교 관련 유물들이 발굴된 점은 당시 고구려와 한강을 두고 최전방지역에 절을 세웠다는 설이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단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백제는 마라난타 스님이 전한 불상, 불경 그리고 사찰건축을 대를 이어 확산시켰고 500년대에는 노리사치계를 통해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불교를 통한 국제질서에 적극적인 역할에 나섰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절이 사상적으로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면 당시 4세기 경 국제질서는 불교를 통한 사상과 종교통합이 확산되는 시기였고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백제였음을 마라난타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는데 우여곡절을 겪은 반면 백제는 왕실주도로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점 때문이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왕실로부터 전파된 다양한 형태의 불상과 복식 그리고 불경은 토착신앙과 공존을 꾀했고 백제의 국론통합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치 쿠샨왕조 카니시카 왕때 불상의 조성 연유와 다르지 않다. 신라도 자장과 의상 스님을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 사리와 불경을 포함한 성물(聖物)을 들여왔다. 이를 고구려와 최전방 지역인 강원도 일대에 사찰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한 것을 보면 민심 통합과 불법을 통해 나라를 수호하려는 왕조의 흔적들을 사적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불상도 시대와 민심, 신심 대변

불상으로 대변되는 간다라 문화문명 고향출신인 마라난타 스님은 당시 서방의 문화문명을 백제에 직접 전수했다. 백제 출신을 스님으로 출가시킨 백제 불교의 시조였다는 점에서 재조명 받을 만하다. 불상과 불교만을 전파한 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의 문화문명을 백제에 전수 했다는 점 때문이다.

전수한 문화문명과 함께 불상의 변천도 16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진화되고 있는 모습을 각 사찰의 불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간다라지역의 불두와 불상과 원형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 시대상을 불상을 통해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사찰이 위치한 산세와도 조화를 꾀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에는 관세움보살상, 약사여래 기운이 깃든 곳은 약사여래상, 아미타불이 주석한다는 곳에는 아미타불상 등을 모신 것만으로도 민간 신앙을 수용하고 함께 공존하려는 불상의 기원과도 일맥상통한다.

불교가 처음 유래된 삼국시대 때는 지금과 다른 화엄종, 열반종, 법상종, 관음종 등 5종의 종파가 유행했고 각 종파마다 모시는 주불이 달랐던 점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간다라에서 만난 불상과 불갑사 대웅전 불상 그리고 일본에 전한 반가사유상,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성북동 길상사 경내 관세음보살상 등은 시대와 사상이 변천하는 동안 불상도 어떻게 변하는지를 대변하고 있다. 불상을 통해 민심과 신심을 적극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전 연합뉴스 기자 ㆍ 천년고찰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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