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다. 견색(見色)은 견심(見心)이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본대로 사물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인연에 따라 사물을 해석하며 자기 업의 눈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관심이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인연에 따라 즐거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 옆 골목에 철물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삼 년이 걸렸다는 사람이 있다.

수석 수집가에게 돌멩이는 금덩어리처럼 귀한 물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보는 고양이와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보는 고양이는 다르다. 새가 보는 하늘과 토끼가 보는 하늘도 틀릴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물자체(物自體)가 아니다. 내 몸도 국토도 온 우주도 내 마음에 비친 그림자 같은 것으로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실재라고 느끼는 우주는 홀로그램이거나 망념(妄念) 시스템이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실재하는 것들의 실체를 잘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를 제창한 하이젠베르크는 “관찰자가 없으면 현상도 없다”라고 단언했다. 다시 말해,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 객관적 관찰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3차원의 세계는 실재가 아닌 나타난 현상일 뿐이며, 모두 내 마음이 그려낸 것에 불과하다〔三界唯心 萬法唯識〕는 것이 유식학의 태도다. 유식학에 따르면 다섯 개의 감각기관이 외부대상을 받아들이고, 제6식은 제8식이 가지고 있는 경험 정보를 전달받아 외부대상을 식별한다. 제8식(아뢰야식)은 개체의 모든 경험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 덩어리이다. 제8식에 보관되어 있는 경험 정보(업)의 차별성 때문에 세계는 각자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다. 게다가, 제7식은 아집의 의식 덩어리인데 대상을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도록 영향을 끼친다. 결국,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물의 모습은 식(識)의 변현(變現)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망상 덩어리이며.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경험 정보나 업의 재현인 것이다. 볼 때 그저 보고 있고, 들을 때 그저 여여하게 듣고 있는 그 자체만이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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