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사월운(雲駛月運) 주행안이(舟行岸移)는 『원각경』 금강장보살장의 한 구절이다. 구름이 달려서 달을 움직이는 것 같고, 배가 움직여 언덕을 옮기는 것 같다는 것이다. 같은 경전에 망견공화(妄見空華)라는 말도 있다. 달도 언덕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구름이 달리고 배가 움직여서 달과 언덕이 치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지켜보는 자’는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고 있을 뿐인데 헛것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자주 쓰이는 비유에 의하면, 영화의 하얀 스크린은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나, 스크린 위로는 전쟁도 지나가고 쓰나미·태풍도 지나가고, 영욕·고락·돈·몸·생각·감정 등 온갖 것이 다 오고 간다. 그러나, 삼라만상 천변만화의 현상들이 명멸하여도 그 모든 것의 배경에서 태풍의 눈처럼 공적하고 여여하게,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성성적적하게 알아차릴 뿐 아니라 사철을 운행[四時行焉]하며 만물을 생육[百物生焉]하고 있는 실재를 불성·진아(眞我)·일심(一心)·본래면목·진여(眞如)·무(無)·공(空)·태극·천(天)·리(理)·곡(谷)·성령 등 다양한 명사로 부르는 것 같다. 머리를 헤드(head)라고 부르든 토우(tou)라고 부르든, 아타마(atama)라고 부르든 머리는 여전히 머리일 뿐인데 무엇이라 부르든 머리의 본질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상계의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오는 것은 가고[生者必滅] 가는 것은 온다[去者必返]는 순환의 이법이다. 25만 년 전 경 지상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땅에서는 900억 명의 인간이 살다가 죽어갔다고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허망한 유령의 숫자로 그 속에 산입 될 것이다. 우리는 달려가는 구름이고 수면 위를 움직이는 배이며 스크린 위를 서성거리는 홀로그램이고, 궁극적 실재의 아바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왔던 길은 이미 날이 어둡고 가뭇가뭇하여 행적을 추적할 수 없고, 가는 길은 신 새벽 안개 자욱한 꿈길 같아 여정을 알 수 없으니 기댈 곳이 ‘지금 여기’ 밖에 없다. 부처님은 금생에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원하는 중생들에게 학문과 기술, 보시와 지계를 강조한다. 다시 내생에서 행복을 원하는 중생들에게는 또 다시 보시와 지계[施戒生天]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궁극적 행복[至福]을 원하는 중생들에게는 열반증득을 언급하신다. 열반증득이란 무엇인가? 그대가 믿고 있는 ‘나’라는 것은 구름이고 배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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