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무의식중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꿈을 꿀 때 의식은 끊어져 있다. 무의식과 의식은 빛과 어둠처럼 동거가 불가능하다. 의식한다는 것은 이미 무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밤에 꾸었던 꿈을 깨서 선명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중의 사건이 의식의 표면 위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꿈은 꿈을 꿀 때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꿈속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사라진 꿈속의 내가 꿈의 기억을 의식에게 배달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방과 단백질 덩어리인 뇌가 뉴런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을 통해 시냅스 말단조직 어디에 꿈의 기억을 저장해 두었던 것일까? 오감을 통해서 입력된 정보는 뇌의 CPU를 거쳐 모니터에 신호로 떠오른다. 그 신호를 모니터링하는 관찰자는 뇌 자체가 아니다. 관찰 되어지는 것은 관찰의 객체이지 관찰자가 될 수는 없다. 객체는 주인이 아니다. 꿈을 지켜본 자는 누구인가?

이 몸 혹은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나’라는 착시에서 벗어나 변하지 않는 여여한 실재-한마음(참나, 본래면목, 불성 혹은 성령)을 나라고 정견 한다면, 이 생생한 현상계도 한마음이 꾸는 한 덩어리의 꿈이다. 한마음이 전제되었을 때 이 몸은 그대로 귀중한 화신이지만, 주종을 따지자면 이 몸은 마음의 껍데기이자 계절이 바뀌면 벗어 던져야 하는 낡은 외투에 불과하다.

『순자(荀子)』는 “마음은 형체(形體)의 임금(心者形之君)”이다라 하였고 『회남자(淮南子』에는 “마음이란 몸의 근본(心者身之本也)”이다라는 구절도 있다. 몸과 수상행식이 ‘나’라면 ‘나’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주에 “피투된 (상대적) 존재”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숙명처럼 알고 살다가 생로병사의 악순환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여여하게 지켜보고 있는 한마음을 ‘나’라고 자각하면 온 우주가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대 긍정의 꿈이 펼쳐진다. 삼라만상이 바로 ‘나’이며, ‘나’ 밖에는 먼지 한 톨도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종, 불생불멸의 여여한 한마음은 생로병사가 없으므로 윤회도 환생도 없으며, 천계 만사략과 온갖 번뇌 망상이 붉은 화롯불에 눈송이 녹듯이 사라진다. 비로소, 몸과 수상행식도 한마음의 금빛 협시불이 되어 한마음이 자기 자신을 체험하는 동반자가 될 것이며, 걸음걸음 마다 자취 없는 육바라밀의 발자국을 찍을 것이다.

드 샤르댕 신부에 의하면 “우리는 영적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된 체험을 하는 영적 존재”이다. 꿈도, 꿈속의 꿈도, 생생한 현상계도 영적 존재(한마음)의 작용이며, 우리 모두와 중생계도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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