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가타(Therigatha)』라는 초기불교 시대 경전은 101명의 여성 수행자(장로니)들의 공동시집이자 오도송 묶음집이다. 『쿳다까 니가야』의 15부 경전 중의 하나이다.

“설사 오는 길을 알지 못하고, 그 떠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인생의 과정이니라. 여기서는 다른 중생이 되어가고, 저기서는 또 다른 중생이 되어 오니 오고 가는 사람마다 그 모양을 바꾸어 오고 가니라. 가는 듯이 온다면 그 무엇을 슬퍼하랴”

500여편 중 한 수이다. 러시아 국민시인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빨리어 버전으로 읽는 것 같다. 미당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작품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라는 구절도 스쳐 간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알 수는 없으나, 이 지상에서 반드시 한번은 헤어져야 한다. 그러나, ‘다시 만난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신앙이고, 믿음이고, 희망이고, 철학적 추론이고, 불확실한 확신이지만 헤어진다는 것은 만물의 생주이멸과 성주괴공, 생멸순환의 연기적 이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전개되는 팩트이다. 팩트는 과학적 결론을 주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은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승찬 스님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아서, 오직 간택함(분별지)을 싫어할 뿐이다(至道無難 唯嫌揀擇)”라고 강조하고, 지눌 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만약 알기(깨달음)를 구한다면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모른다는 것’만 알면,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본성을 본 것이다(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라고 주장했다. ‘오직 모른다는 것’ 혹은 ‘판단중지(epoche)’만이 진실로 가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맥락이 다를 수도 있지만, 현상계인 우주에는 인간의 인식이 불가능한 암흑물질이 총 물질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전파·적외선·감마선 등과 같은 전자기파로도 관측되지 않고 오로지 중력을 통해서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우리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우주는 우주 전체의 2~3천억 분의 1에 불과하고, 아주 작은 미립자의 미시 세계에도 10의 22제곱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물 한 방울에도 8만 개의 생명체가 있다고 한다. 무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제로에 가깝다. 토끼가 달나라를 어떻게 알고, 개구리가 삼계육도를 어떻게 알겠는가? “오는 길을 알지 못하고, 그 떠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지” 않는다. 모른들 어떠하리! 돌아오지 않는 강도 언젠가, 어디엔가 도달하지 않겠는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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