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하안거 결제도 어느덧 반철에 이르렀다. 제방의 수좌들은 화두 하나를 생명삼아 참구하고 있을 터이고 강당의 학인은 팔만장경 불조의 고구정녕한 말씀의 뜻을 얻고자 밤을 잊고 책장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결제에 들지 못한 스님들은 주석하고 있는 사찰에서라도 불자들과 함께 기도정진으로 한철을 보내고, 종단의 소임자들은 갖가지 행정업무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고 힘을 다하고 있다.

이렇듯 형식은 다르더라도 주어진 여건에 따라 정진의 모습을 보인다면 위로는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 한편으로는 보살행을 실천하니 사부대중 모두가 결제에 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겠다.불교의 생명력은 무엇보다 수행에 있다. 수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종단이 지향하는 ‘대승교화 종단’도 종도들의 수행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허무맹랑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단의 발전이니 화합이니 하는 말들도 수행에 근간을 두지 않고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수행에 관한 종도들의 의식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을 따져본다면 종단의 화합과 비전을 가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종단은 열악한 재정 탓인지 종도의 교육과 수행에 대해 이렇다할 계획조차 내놓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잘못이 지도자들의 탓만은 결코 아니다. 웬만한 사람들의 전화세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의무금이 종단의 주 수입원인데 그나마도 절반을 넘지 못하는 납부율을 감안한다면 무슨 재정이 있어 교육과 수행에 관한 종책을 세우고 시행하겠는가.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수수방관만 한 채 현실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재정이나 참여율이 없다면 수행하는 풍토라도 조성해야 한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번 하안거 결제기간에 중앙승가강원 졸업1기스님들이 태고총림 선암사에서 일주일간의 단기결제를 가졌다고 한다. 대부분이 종단의 중진이고 각자 사찰의 주지 소임을 맡고 있기에 여러 가지 바쁜 사정이 있을 텐데도 만사를 제쳐놓고 짧은 기간이나마 총림의 정진대중으로 참여한 열정과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이 일이 우리 종단 수행에 관한 하나의 이정표이자 방편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어차피 우리 종단이 개별사암 중심일 수밖에 없다면 종도들의 수행도 개개인의 참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종단은 그렇게 참여하는 종도에 대해 무언가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경우에는 참여해야 할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법계를 부여할 때 반드시 수행이력을 갖추어야 승급을 인정하거나 소임자의 자격을 논할 때도 수행이력을 감안하는 등의 방안도 강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총림을 과감하게 개방한 태고총림의 소임자들의 용기도 높이 사야 마땅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단기결제라는 것은 총림의 전통을 벗어난 파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석 달 간의 결제기간만을 고집한다면 결코 접하기 쉽지 않은 대중처소의 생활체험에 대한 길을 열어주고, 정진대중의 만만치 않은 뒷바라지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용기있는 결단을 했다고 하겠다. 이제 수행의 길은 멀리 있거나 막혀있지 않다. 다만 약간의 시간과 각오가 있다면 자신의 근기에 맞는 길을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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