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등 구미 각국에서는 근자에 들어 '부처님 따르기'가 확산일로에 있는 모양입니다. 바람결 소문들을 모아보면 마치 동아(東亞)에 한류(韓流) 물결이 탕탕하듯, 물건너 저쪽 구미에서는 불류(佛流)가 선풍인 듯 합니다. ('불류'란 용어가 부처님을 연예인 인기몰이 하듯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직까지 저 쪽 사회의 주류는 되지 못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니, 표현이 거칠더라도 용서바랍니다.) 유럽문화를 선도하는 프랑스의 경우만 보더라도, 최근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는 "프랑스에 불교신자가 급증, 불교가 5대 종교로 성장했다"는 요지의 보도를 낸 바 있습니다. 프랑스 내무부는 '충실한' 불교 신자를 (아시아계가 아닌) 프랑스인 20만을 포함, 약 45만 명 가량으로 추산하는 데 이는 유대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불교 전문가인 파브리스 미달 씨는 여기에다 '불교에 동조적인' 사람을 합쳐 약 5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니,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니군요.돌아보면 서양철학자 니체가 '신의 죽음'을 예고한 이래 100년, 구미의 불교세 확산은 괄목상대할만 합니다. 발현 양상도 다양하구요. 특히 최근 30여년 사이 불교는 기존의 일부 엘리트 계층만의 지적 호기심에서 벗어나, 대중의 관심이 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승(禪僧)들이 대규모 선 수련장과 티베트 불교 수도원을 중심으로 포교에 전력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구요. 10여년 전부터는 불교에 대한 매스컴의 관심도 지대해졌습니다. 특히 티베트 불교의 약진이 돋보입니다.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달라이라마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집니다. 한때 할리우드 전체가 오로지 달라이라마만을 바라보는 듯한 적도 기억하실 겝니다. 영화 '리틀 부다' '티베트에서의 7년' '쿤둔' 등이 새삼 떠오르네요. 이처럼 '진정한' 만남은 최근의 일이라 하더라도, 고대부터 (아쇼카 왕으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동양 불제자와 (마르코 폴로로 대표되는) 유럽 사이에는 드문드문 접촉이 있어온 게 사실입니다.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부처님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절망적 허무주의, 동양의 가톨릭, 합리주의, 무신론적 신비주의, 하나의 철학, 비의(秘意)로 가득찬 삶의 지혜, 현대적 인문주의, 심지어는 퇴폐적인 기독교 사상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이 모든 상(想)은 그들에 의해 '해석된' 불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교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실상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거울에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상을 투사한 게지요. 지금의 서양 '불류'는 어떨까요. 불교가 서양에 진정으로 뿌리내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걸까요. 원시불교, 중국불교, 티베트 불교, 한국불교 하듯 프랑스불교, 미국불교 등을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할까요. 이와 관련 아시아계 불교 신도와 프랑스인 신도 사이에는 종교 생활에도 차이가 있다고 앞서의 베리씨는 분석합니다. 아시아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매우 헌신적인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하는 반면 프랑스 본토인들은 불교를 '엘리트들을 겨낭한 가르침'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게지요. 그는 종교적 책임을 외면하는 프랑스 신도들에 대해“불교에서 강조하는 자기희생 정신을 외면하고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식”이라며 참여적 종교생활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불교이고 정법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불교사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부처님'과 '해석된 부처님' 간의 변증법적 지양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는 타 종교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모든 시공상의 제도로서의 종교는 개혁을 통해서만 진면목으로 돌아갑니다. 한국불교 역사 1,600여년 동안에도 교단의 부침과 수행방법, 재가자의 신앙형태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불교 정체성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바뀌어야 할 부분'과 '바뀌어서는 안될 부분'을 잘 설정하는 것은 참 중요한 작업입니다. 지나친 일탈은 초기불교에의 회귀를 필연적으로 부를 수 밖에 없고, 반대로 교조적 정체성은 '지금 이곳의' 중생제도를 위해 과감히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얘깁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구미의 불교가 어떠해야 한다든지, '니네들이 행하고 있는 방식은 진정한 부처님 길이 아니다'라든지 하는 원론적 얘기는 일단 논외로 하렵니다. 먼저 부처님을 만난 한국불교가 그네들에게 뭘 도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따위도 필자의 능력 밖이구요. 다만 한가지,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고뇌에 젖은 얼굴이 아니라, 부드럽게 미소짓는 무심한 얼굴"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존재에 대한 겸허한 긍정, 그 존재에 대한 동체대비의 보살심, 탐진치 삼독을 지워버린 무심의 마음. 연좌에 앉으신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을 대신할 날이 결코 오리라는 믿음은 저 혼자만의 망념은 아닐 겝니다. 외람되게도 작금의 구미 불류가 그리 말하고 있다고 여겨지네요. 삶의 상처가 아릴수록 미소는 더 온화할 겝니다. (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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