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인가? 한 사나흘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리라는 기상대 예보가 눅진눅진하게 느껴진다. 지난 8월 8일이 입추, 23일은 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한다는 처서, 내달 8일이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는 백로다. 한국서는 ‘바다이야기’니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니 시끄럽고, 북한서는 핵실험 강행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미 사법당국은 불법 이민자 내쫓는답시고 길거리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는데 웬 뚱딴지 절기 타령이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두발로 딛고 서 있는 이 지구 땅덩어리가 태양 주위를 바쁘게 돌고 있다는 사실이 하도 신기해서다. 그래서 또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가는데....도대체 당신과 나는 어떻게 변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노자(老子)에게 물어보니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다”고 한다. 사람 인(人)과 두 이(二)가 합쳐진 어질 인(仁)은 ‘인간적인’ ‘인정이 많은’ 등의 의미로서 사람과 사람 즉 세상에서 더불어 사는 철학이라고 배웠는데 세상을 품은 천지가 불인하다니? 너무 당혹스러워 배신감마저 느껴진다.그러나 엊그제 경남 창원 불모산동의 한 주택가 셋방에서 죽은 지 너무 오래돼 백골상태로 발견된 40대 여성의 혼백은 슬픈 눈 즈려 감으며 고개 끄덕이리라. 모두들 쫓기듯 살면서도 허겁지겁 알량한 욕심 채우려고 덤벼드는 마당에 맹자의 ‘측은지심 인지단야’(惻隱之心 仁之端也)는 대입 논술시험의 주제로나 적합할 뿐 주머니 속의 먼지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제로섬 게임에 미쳐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참 외롭고 쓸쓸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천지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세상 또한 불인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혹시 인간(人間) 또한 불인한 건 아닌지?! 수단에서 지난 3년 동안 20여만명이 살해되는 등 대량학살이 진행되고 있고 러시아 도네츠크 인근에서 여객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171명이 전원 사망했다지만 치주염이 너무 악화돼 조만간 고기도 못 씹어 먹을 거라는 치과의사의 경고만을 곱씹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있었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 사람 ‘人’ 옆에 한 일(一)이 붙든 두 이(二)가 붙든 누가 개의할 것인지 의심스럽고, ‘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미하므로 ‘仁‘과 통한다고 침 튀겨봤자 귀담아듣는 사람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가랑비 오는 날이면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하늘과 땅 사이 나 혼자...”라고 흥얼흥얼 청승떠는 당신과 나는 추구(芻狗),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풀로 엮은 강아지, 천지도 불인하고 세상도 불인하고 인간도 불인하다는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원래 그렇고 그렇기에 공자나 맹자나 입만 열면 인(仁)을 외쳤던 것은 아닌가? 꼭 그런 것만 같아 씁쓰레하기 짝이 없다.맞다. 불인해야 속이 편하다.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이 제기한 ‘바다이야기’ 연루설에 대해 치를 떨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악랄하게 갈 것”이라고 입술을 깨문 배우 명계남이나 유진룡 전 문화부 차관 경질 파문과 관련 “배 째드리죠” 발언의 주인공으로 지목돼 국회에 불려나왔으면서도 ‘당신들’이니 ‘일개 비서관’이니 하는 발언을 삼가달라고 의원들에게 큰소리를 친 청와대 비서관 양정철처럼 굳세게 살아야 한다. 천지가 쓸쓸해지는 계절이 오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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