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치신 진실하고 영원한 행복은 세상의 모든 일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소멸되는 바를 바로 보는 데서 얻어지는 것" 양은그릇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요즘도 간혹 보이지만 얇고 가벼워서 쓰기에 편하고 게다가 가격도 저렴해서 밥그릇이며 접시 등 온갖 양은그릇으로 밥상을 차림은 물론 도시락에 이르기 까지 즐겨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은 찌그러지기 쉬워서 그리 험하게 다룰 물건은 아니었지만 찌그러졌다고 해서 버리지는 않았고 칼자루며 작은 나무 방망이로 다시 펴면 아쉬운 대로 쓸 만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절집에서의 양은그릇은 여러 사람의 공양을 차리기에 안성맞춤이어서인지 신도님들의 공양 상은 양은그릇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그릇은 여전히 유기로 된 것이어서 큰 불공을 앞두면 기왓장을 가루로 만들어 짚으로 된 수세미로 힘들여 닦아야만 했습니다. 양은그릇보다는 한결 고급스러운 스테인레스 그릇이 나오기는 했지만 완고하신 스님께서는 접시까지는 허용했지만 마지그릇 만큼은 용납하지 않으신 채 손수 기와가루를 빻기도 하셨고 심지어 직접 닦기까지 하시니 거기에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무렵, 스님께서 주신 역대 큰스님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읽다가 ‘그때 찾아온 수좌의 법기(法器)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라는 대목이 나와 스님께 법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여 부처님의 법을 담을만한 정도’라는 대답을 듣자 은사스님이 유기그릇에 집착하던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음식물을 담아먹는 그릇에도 용도와 격식은 물론 상하(上下)가 있습니다. 물론 절대평등을 추구하는 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이는 경우가 다릅니다. 간장종지에 밥을 담고 국그릇에 간장을 담는 것은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고, 어른자리에 아이가 앉으면 예의를 벗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가장의 밥그릇을 달리하고 가끔 공양을 함께하지 않은 경우에도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그 노고와 권위에 존경을 표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귀여운 반려동물 일지라도 사람들의 밥그릇과 동물의 밥그릇을 달리하는 것은 위생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생활 형편이 나아져서인지 추억을 상품화하는 식당에서나 양은그릇이 보이지 더 이상 우리의 식탁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고급스러운 식당이라면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큰 그릇에 온갖 치장을 한 음식이 차려져 있음을 보고 음식이라는 게 반드시 먹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정성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렵고 가난하던 시절에는 어디에 담든지 푸짐하면 만족했지만 요즘은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지요. 불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기에 우리는 부처님을 의지하고 가피를 바라는 기도를 올립니다. 제 경험으로는 부처님의 가피를 바라는 내용도 세월에 따라 많이 달라졌습니다. 건강과 사업이 잘 될 수 있도록 축원을 드려달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시던 시절에는 없었던 대학입시며 공사입찰의 낙찰을 기원하는 기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합니다. 나는 그러한 기도를 부탁받을 때마다 시주님의 그릇을 가늠해 봅니다. 혹시 간장종지에 밥을 담아달라고 하지는 않는지, 접시에 물을 부어달라고 하지 않는지를 살펴봅니다. 학교의 성적이나 적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좋은 대학을 바라거나 주변의 평판은 되돌아보지 않고 승진을 바라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그릇을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 사바세계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은 그 정도의 가피를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지만 나는 화를 감당하고 비난을 삭여버릴 그릇이 못되는 정도의 근기이니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지요. 그들 나름대로의 변명도 있습니다. 실력이 되고 조건이 된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 가피를 바라느냐는 것이지요.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이 인연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모습과 처지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전생부터 이어온 인연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어느 실존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어온 업의 결과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노력이라는 인연을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바라는 바를 성취하려면 우선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를 따르겠다는 굳은 서원과 신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가르친 연기법을 무시한 채 현세의 바람만을 희구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욕심만 채워달라는 생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도반스님은 항상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이미 나이도 있고 강사가 될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습을 쌓아놓으면 다음 생에는 부처님의 경전에 막힘없는 불경박사가 되지 않겠느냐며 웃을 때마다 그분의 신심과 원력이 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답다는 존경심이 절로 우러납니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유명한 대학을 가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마침내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고, 남편이나 아내가 그리 큰 출세를 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와 가정에 충실하다면 참다운 불자의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중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과 같습니다. 나는 그 목적을 행복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물론 저마다 생각하는 행복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재산이 많은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추구합니다. 또 다른 이는 건강을, 자녀들의 출세를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등 사람에 따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행복을 느낀다 해도 머지않아 더 많은 재산과 큰 권력, 명예를 바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평생을 건강하게 산다고 해도 죽음을 면할 수 없고, 명예와 부는 돌멩이에 잠시 기록되는 허망한 것이지요. 부처님이 가르치신 행복은 그러한 일시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치신 진실하고 영원한 행복은 세상의 모든 일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소멸되는 바를 바로 보는 데서 얻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다가오는 인연의 소중함이 보이고 떠나감의 인연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막대한 부를 쌓아 놓은 어느 세계적 기업의 경영자가 헐렁한 셔츠와 청바지에 젓가락처럼 마른 몸을 감추고 화면에 나타났을 때 세상은 재산을 두고 다투는 전처와 가족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통치자들도 오히려 갈 곳 없이 세상을 떠도는 유랑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거나 재판정에 서야하는 일은 인연을 소중히 다루지 못하고, 이루어진 일들이 마침내 허물어지고 만다는 법칙을 알지 못한 채 영원한 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갓 필부를 자처하는 우리에게 그리 큰 부와 명예가 없으니 안심해도 좋을 일이지만 작으면 작은 대로 잘못된 인연의 과보는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살펴야 합니다. 다시 그릇의 이야기로 마무리 할까 합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드물지만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의 풍습은 국그릇은 저마다 따로 하고, 밥은 커다란 양푼그릇에 함께 담아 먹었어요. 저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자기 앞을 열심히 파먹다 보면 바닥이 보일 때까지도 양에 차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형제 많은 어린 시절이라 서로의 눈치와 장난기가 발동해서 남은 밥을 자기 국그릇에 퍼 담기 시작하면 밥상은 엉망이 되고 결국 아무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곤 했지요. 같이 살던 사형제들 가운데 맏이였던 나는 여지없이 사제들의 머리통에 숟가락을 날렸고 결국 남은 음식은 강아지 밥그릇을 채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때 스님께 불려가서 무릎 꿇고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극락은 밥이 한 그릇 부족한 곳이고, 지옥은 밥이 한 그릇 남는 곳이다. 극락세계 사람들은 부족함을 배려해서 양보한 덕에 부족하지만 모두가 배부르지만, 남을 한 그릇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지옥중생들은 결국 한 그릇도 먹지 못하니 너희들도 그와 같다.” 그래도 우리 사형제는 장난기와 다툼을 그치지 않았고 결국 사제들은 모두 속퇴한 채 나 홀로 절집을 지키고 있으니 인연을 소중히 다루지 못한 과보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처님께 가피를 바란다면 과연 가피를 담아낼 나의 그릇이 얼마만한가를 먼저 살펴서 그릇을 넓히고 정갈히 하여 잠시의 인연일지라도 소중하게 다룬다면 비록 덧없는 세상의 행복이라 해도 세세생생에 이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법담 스님(제주교구종무원장 · 제주 백련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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