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解行證’이 불자가 가야할 길입니다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해야 할 일은 사람에 따라 천 가지 만 가지일 것입니다. 그중의 한 가지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종교방면으로 말하면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반드시 그 종교의 최고의 목적이 있고 깊은 진리가 있는 것이므로 그 목적을 성취하려면 그 진리를 통달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목적은 높고 멀고 진리는 깊고 어려우므로 대개 일반 사람들이 연구에 철저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이름만 걸어두면 불자가 된 양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에 귀의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커다란 신심과 원력, 그리고 꾸준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불교에 있어서 구비돼 있는 요소는 불교 자체인 교(敎)와 교에 포함돼있는 이(理), 그리고 이(理)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행(行)과 이(理)에 따라 수행하면 최후에 얻어지는 과(果)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깊고 크고 넓고 미묘하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역시 네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敎)를 믿는 신앙[信], 둘째는 이(理)를 알아 들어가는 이해[解], 셋째는 행(行)을 닦는 수행[修], 넷째는 과(果)를 얻는 증오[證]입니다. 이 네 가지가 하나도 쉬운 것은 없어요. 얼핏 생각하면 믿는다는 것은 매우 쉬울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나는 불교를 믿습니다 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이 될 것 같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믿음이 될 수 없어요. 믿으려면 참으로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철저히 믿지 않고는 교리도 알 수 없고 행도 닦아지지 않습니다. 이치도 모르고 행도 없는 믿음으로는 도저히 과(果)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니 가장 우선시하는 조건이 철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해와 수행이 없고서는 믿음이 견고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교리를 모르면 철저한 믿음과 수행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도 불교에 입문한 불자라면 반드시 교리를 배워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를 통틀어 말하면 오승(五乘)이 있으니 곧 인승(人乘) 천승(天乘)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승(乘)은 타고 다닌다는 수레[車]를 뜻합니다. 수레는 사람이나 물건을 실어서 운반하는 것이므로 불교에 일체 중생을 실어서 험하고 괴로운 현실세계로부터 즐겁고 편안한 이상세계로 옮겨가는 것이 수레와 같다는 의미로 비유한 것입니다. 인승, 천승은 불교의 기초가 될 뿐이고 불교의 중심은 거기에 있지 않아요. 인승 즉 오륜(五倫)을 배우면 세간에 좋은 사람이 되고 천승 즉 십선업(十善業)을 닦으면 인간을 떠나서 천상에 나는 것이나 그것도 불교에서는 희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상이 인간세계보다는 즐겁고 복이 많은 곳이지만 그것도 삼계(三界)의 안에 있기에 천복이 다하면 어김없이 도로 생사윤회의 고(苦)를 받기 때문입니다. 성문승부터는 참으로 불교를 닦는 것인데 성문은 사제(四諦)를 주로 하고 연각은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주로 합니다. 성문 연각은 모두 출세(出世)하여 이 삼계 밖으로 나아가서 생사윤회를 받지 않지만 다만 자기 혼자만이 생사를 면할 뿐이고 일체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이타적 대승행이 되지 못하므로 소승(小乘)이라고 합니다. 보살승은 육도(六度) 만행(萬行)을 갖춰 닦으며 삼계의 사생(四生)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대승행이니 이 보살승을 닦아야 비로소 우리가 지고 무상한 목적을 삼는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보살승은 자리와 이타를 병행하고 입세(入世)와 출세(出世)에 걸림이 없습니다. 보살행을 닦아서 불도로 들어가더라도 반드시 인승, 천승, 성문, 연각승의 공덕을 버리지 못하고 점차적으로 쌓아서 오랜 시간을 지나야 됩니다. 그러나 오승을 통하여 먼저 삼보께 귀의해야 합니다. 불법승 삼보가 불교를 배우는데 있어서 최고의 귀의처입니다. 삼보중의 불(佛)은 진리를 구경원만하게 깨달으신 성인이고, 법(法)은 인생과 우주에 있는 절대적 진리이며, 승(僧)은 삼승의 성현이니 설사 진리에 대해서 아직 철저한 깨달음이 없다 할지라도 벌써 부처님의 법 바다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째서 삼보께 공경 예배 찬양 공양해야 하는 걸까요? 이것은 다만 성신(誠信)의 표현만도 아니고 또는 일반이 아는 바와 같이 공덕만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보와 승보의 숭고한 덕성, 원만한 지혜와 법보의 절대적 진리로 향해 가서 우리도 꼭같은 철저한 깨달음을 얻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경전을 비롯 불서를 많이 읽고 기회가 닿는 대로 열심히 법문을 들으며, 계행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노력을 지속해야 합니다. 삼보를 가장 숭고한 이상적 목표로 삼고 끊임없이 수학하여 불보살님의 자비원력으로 가피하고 섭수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삼보 속에 한가지로 융화되어 복과 지혜가 하루하루 증장해 숭고한 목적지에 점점 접근하게 될 것입니다. 삼보가 신성하지만 자기의 신앙이 없고는 삼보가 감응하지 않아요.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있으면 삼보가 있고 믿음이 없으면 삼보가 없어요. 믿음에서는 원겁이 일념도 될 수 있고 무변한 불찰을 손바닥의 구슬처럼 볼 수도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백가지 천가지 법문이 모두 거짓 말씀이고 팔만대장경도 다만 휴지가 될 뿐입니다. 일평생 중생을 위하여 희생을 당한 대성 석가세존의 도법으로 하여금 거짓 말씀이 되지 않게 하려거든 묵묵히 그리고 철저히 믿으십시오.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바로 믿는 마음입니다.부처님을 우러르며 그 위대한 덕을 믿고, 부처님께서 우리와 같은 범부에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을 믿고 따라서 중생인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방도와 어떻게 수행해야 그 길을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과 안내가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 속에 모두 있으며 나도 그 가르침대로 배우고 익혀서 그 길을 굳건히 가야 하고 또 갈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신심(信心)으로 정진을 계속해 나가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진정한 불자입니다. 이런 신심으로 닦고 또 닦고,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닦아나가는 것이 바로 불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이렇게 계속하여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닦아나가다 보면 자기 생각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량(思量)이라고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정의하면 바로 아집이 됩니다. 신심이 곡식(穀食)이라면, 사량은 풀이나 잡초라 할 수 있어요. 신심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사량과 아집을 자꾸 배제를 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량은 망상(妄相)이고 분별이며 잡념이고 결론적으로 말해 번뇌예요. 번뇌망상이나 사량분별 이런 것이 끼어들면 신심은 흐려져 도(道)를 닦는데 고충이 따릅니다. 이것을 바로 ‘마구니’라 합니다. 마구니는 신심을 흐리게 만들고 정진을 해 나가는데 있어 큰 지장을 줍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삼보에 귀의하며 지성껏 자기를 닦아나가고 수행하면 자타(自他)가 결국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다보면 진리의 세계가 활짝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불자들은 기도를 하면서 항상 축원을 해야 합니다. “복덕은 성취되고 죄업은 소멸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축원하며 기도하세요. 그리고 참회 축원을 해야 합니다. 참회는 수행도 되고 기도도 됩니다. 중생들은 어리석고 남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내가 만들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모 탓, 팔자 탓, 이웃 탓, 또는 시대를 잘못 만나서 등등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입니다.내가 어리석어서, 그리고 내가 잘못된 업을 많이 쌓아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회합니다.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늘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면서 진실 되게 살았는지 점검해 보고 참다운 자기로 돌아가야 합니다.서원을 세워놓고 열심히 수행정진 기도해 보세요. 거룩한 삼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육바라밀을 일상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해 보세요. 복 짓는 행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육바라밀을 끊임없이 실천하면서 복을 많이 짓고 또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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