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종무원장 홍제스님인간은 행복을 찾는 나그네라고도 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저 산넘어에 행복이 있다고들하기에...’하며 노래 했다. 그러나 그 산너머에도 또 그 산너머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무지개를 찾는 소년의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인생은 끊임 없이 행복을 얻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무지개를 잡지 못하듯이 인생도 후회스럽게 마감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안다. 행복은 결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옛 선인들은 '소욕지족(小欲知足)'이라 하여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고 '안빈락도(安貧樂道)'의 생활을 했다. 부처님도 쓸데없이 큰 욕망을 부리는 것을 경계하셨다. 즉, 남이 버린 것도 기쁘게 활용해 쓸 수 있고,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소욕지족(小欲知足)을 설하셨던 것이다. 방이 수 십 개라도 내가 누워 잘 곳은 하나뿐이요, 땅이 아무리 많아도 죽어 묻힐 곳은 반 평이면 된다. 문제는 내가 과연 행복하게 느끼느냐에 달린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그 행복을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이를테면 봄이 왔다고 하나 실상 봄을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 다만 잎이 피고 꽃이 피는 그 현상만을 볼 뿐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을 쫓아가며 진성의 본체는 잊은 채 결국엔 탐진치 삼독의 물욕에서 헤매기만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불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불완전한 존재로 떠돌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살아 있는 부처를 찾아야 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믿으며, 이해하며 행하는 생활이 되어야한다.‘비록 나의 성불은 늦더라도 중생을 먼저 제도하겠노라’는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서 선조사스님께서 이르신 악의 근원이 되는 행위를 지적하여 경계하신 것을 먼저 되짚어본다.①교만한 것 ②할 일에 게으른 것 ➂자기본위로 생각하는 것 ➃경솔하게 판단하는 것 ➄욕망의 집념이 지나치게 강한 것 ➅是非善惡의 판단을 뚜렷하게 하지않는 것 ➆믿어서는 안될 것을 믿는 것 ➇남의 행동이나 일에 대하여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 ➈무슨 일에던지 의심이 많은 것 ➉남을 헐뜻는 것 ⑪남이 한 일이라고 경멸하는 것 ⑫싫은 사람이한 일은 인정하지 않는 것 ⑬남이 한 착한 이을 질투하는 것 ⑭질투가 심해 착한 일을 원망하게하는 것들이다. 우리 세상 사는 것을 보면 어떠한가?서로가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도 아랍권의 나라에서는 죽고 죽이는 전쟁이 멈추질 않고 서방강국들은 이들을 돕는다고 그들의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이들 모두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하고, 국민을 풍요롭게 해주기 위해서라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라하고, 미래의 공존을 위해서라하며 결국엔 먹이를 쫓는 들짐승 같은 전쟁은 계속되고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숱한 생명이 결국엔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데 그래도 강한자들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하지 않는가? 종교 또한 그렇다 본질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지만 서로가 기도하는 것이 자기네 국가만 잘되고 자기네 사람들만 잘되고, 자기네 집안만 잘되고, 자기네 식구만 소원성취 하겠다는 기도는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 가게 된다. 안수정등이란 여기에 부합하는 부처님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온갖 비리와 죄악이 활개치고 있고 구조적인 사회악은 사람들을 무력하게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眞理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願을 세워야하며 부처님의 法門을 나의 光明으로 삼으며 나의 진성을 떠나 따로 부처님을 찾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불법을 옳게 믿는 것이다. 이것이 간절하게 진리를 구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달마를 찾아간 혜가(慧可)는 진리에 대한 믿음의 표시로 법을 청하는 의지로 팔을 잘라 바쳤다는 이야기나 진리를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53 선지식을 찾아 법을 묻고 배운 선재동자의 예에서도 보는 것처럼 뿌리 깊은 아집과 탐욕에서 벗어나 비로소 마음이 참 부처인줄을 알게 되는 것으로 반야바라밀 수행을 성취하여 괴로움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는 것이라 그 괴로움(苦)의 모양은 어떤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육체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태어나 늙고 병들고 결국에 죽고마는 4가지 육체적(生老病死) 고통,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것듣, 놓기 싫은 것들과 헤어져야만 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미웁고, 원망스럽고, 대립하는 사람들과 만날 밖에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일들과 어우러져 살 수 밖에 없음에서 오는 원증회고(怨增會苦), 무엇이던 만족하고 싶고, 채우고 싶지만 구하는 만큼 얻어지지 않음에서 오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육신을 형성하고 있는 오온(色受想行識)으로하여, 끊임없이 성장하고, 나타나고, 집착의 대상이 되고, 쉬임없이 허물어져 가는 과정에 세상의 괴로움으로 우리 앞에 보여지는 오음성고(五陰盛苦)는 모두가 한때 잠깐의 모습일 뿐인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연속되고 욕구불만은 끊임이 없어 괴로움이 밀려오는 현상을 비하여 괴로움의 바다(苦海)라고 표현한 것이었다.정각으로 가는 길다시 말해서 괴로움의 세계라는 것은 현상세계인데 모두가 이 현상계에 묻혀 산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의 현상들이 바로 우리들이니 생각을 돌려 백척간두에 진일보하는 결국 정각을 이루고 말겠다는 대분심을 내어야한다.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자세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괴로움이 싹트고, 성장하고 쌓여 괴로움의 결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니 마음을 되돌려 현실에서 끊어지고, 괴로움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 끊어지고 받아 들어야 할 괴로움의 결과가 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정각으로 가는 길임을 알고 주저 없이 행해야 할 것이다. 어느 때 아란존자가 심한 등창이 생겨서 수술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는데 이 수술은 살을 째고 행해야하는 어려운 일이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라 했으나, 아란존자는 부처님께 설법을 요청하였고 부처님의 설법과 함께 수술이 시작되었는데 살을 째고 뼈를 깎는데도 아란존자는 미동도하지 않고 설법에 심취하여 고통을 느끼지 못하였다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느낀바가 있어야하며 결국 성불의 길을 완성해야하는 것이다. 모든 불자가 지향하는 목적지는 성불이다.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발한 후에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으면서 6바라밀을 실천하면 결국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게 된다고 가르쳐주셨다. 남에게 베풀어주고, 계행을 잘 지키며, 욕된 일을 능히 참고, 끊임없이 정진하며, 선정을 닦으며, 슬기로운 지혜를 얻으면 이상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부처님의 약속이시며 얻게 되는 공덕이지만 6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방편으로 아주 작더라도 좋은 인연을 맺으면 성불할 수 있음을 법화경에서 말씀하셨으니 ‘불상을 조성하고 예배,공양하면 필경에 불도를 성취하리라’‘부처님 법을 듣는 자 모두 불도를 이루리라’하신 것은 발심하라는 말씀이며 나 외의 모든 사람들을 불도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일 것이니 부처님법을 믿지 않는 자에게도 작은 인연이라도 맺게 하라는 말씀일 것이며 다함께 정각으로 가는 길임을 천명하신 것이라할 수 있는 것이다.불지광명의 서원중생무변서원도(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번뇌무진서원단(번뇌를 다 끊으오리다)법문무량서원학(법문을 다 배우오리다)불도무상서원성(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시면서 5백의 큰 원(願)을 세우셨으며 아미타불은 58원(願)을 세우셨고, 보현보살은 10원(願)을 세우셨으며 관세음보살은 10원(願),6향원(向願)을 세우신 것을 집약한 것이 사홍서원이다. 이를 쫓아 우리도 원(願)을 세우고 해행을 다함으로써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한량 없는 복전이 될 것이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를 일 아닌가? 그리하여 부처님 위신력은 우리에게 와 있으니 한시라도 게으르지 말고 수행하여 다 함께 이 국토, 모든 중생이 불법광명 가운데서 자비광명의 공덕을 힘입게 되기를 서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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