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귀본처(還歸本處)” 자신을 돌아봅시다.“출가(出家)”를 말할진데 속가(俗家)를 떠나서 승려가 되는 일이라 합니다. 「비유경」에 이르길 “삭발하는 것 만으로 출가라 하지 않는다. 대정진을 일으켜 중생의 일체번뇌를 제거하려 할 때 이를 출가라 한다.”소승은 특이하게도 태어난 출생지가 출가본사(出家本寺)가 되어버렸습니다.초년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소납에게는 큰스승님이 여러분 계시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첫 출가시절 나에게 위없는 복전(福田)을 베푸신 경봉대선사가 계셨습니다.그리고 월하큰스님과 벽안큰스님 두어른이 항시로 큰방어관 좌우로 청산백운(靑山白雲)을 이루시고 법화대산림(法華大山林)을 할 때라 사부대중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룰 때 였습니다.법회가 끝나고 영축산으로 떠날 때는 나이가 제일어린 소승이 큰길가로 나가 택시를 대절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대절할 때마다 한 말씀화두를 꼭 던집니다.“행자야!”“차를 대절할 때는 꼭 운전수 눈을 잘 살펴보거라! 눈빛이 흐리멍텅하면 그냥 보내고, 눈빛이 살아 있으면 대절해서 오거라.”순진하게도 차 모양새 보단 운전기사의 눈빛부터 보고 괜찮다 싶으면 절 입구까지 대절하곤 했습니다.세월이 흘러 오늘날까지도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자신을 점검 하곤 합니다.흔히 일반대중들이 말하길 불교는 너무 철학적이고 난해하여 헤아리기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당(唐)나라 시절 유명한 시인(詩人)이요 정치가이기도 한 항주자사 백낙천(白樂天)이 어느 날 도림선사(道林禪師)를 찾아 갔습니다.선사는 항상 사찰경내(寺刹境內)에 있는 큰 고목나무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좌선(坐禪)을 하고 있어서 나무 밑에서 쳐다보면 꼭 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것과 흡사하여 조소선사(鳥巢禪師)라고도 합니다.백낙천(白樂天)은 경내를 둘러보고 그 나무 밑에 이르러 소문 들은 대로 나무를 올려다 보았더니 까마득한 나무 꼭지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서 좌선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위태로워 보였습니다.그는 부지중에 “아! 위험하다!” 하고 소리쳤습니다.선사는 아래를 굽어보며 똑같은 말로 “아! 위험하다!” 했습니다.白樂天 曰 “이 사람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발은 이렇게 땅을 밟고 있거늘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다는 말씀이요?”鳥巢禪師 曰 “심화(心火)는 상교(相交)하고 식(識)은 허랑(虛浪)해서 정정(靜定)할 줄 모르니 어찌 위험하지 않다는 말씀이요?”백낙천은 자기(自己)의 심중(心中)을 환이 들여다 보는 것 같아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리고는 내심(內心)으로 과연 보통승려가 아니구나 의심하고 슬쩍 화두(話頭)를 딴 데로 돌렸습니다.“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적적대의(嫡嫡大意)입니까?”“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라.” 즉 나쁜짓을 아니하고 착한일만 행하라. 라는 선사의 이 대답을 듣자 백낙천은 소리 높여 껄껄 웃었습니다.“그것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사실이 아니요!”선사는 엄숙하게 “삼척동라도 다 아는 일이지만 팔십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요.”이 말이 백낙천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지(知)와 행(行) 불법(佛法)은 아는 것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행 함으로써 성취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아만심(我慢心)과 식견(識見)을 깨끗이 버리고 진심(眞心)으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고 돈독히 수행(修行)을 했다 합니다.“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법(是諸佛法)”이 게송은 칠불통계(七佛通戒)인것입니다.모든 종교의 근본이요 수행처이며 “주인공”의 본처(本處)입니다.부처님은 세가지 법인(法印)을 근본교의로 하여 변하지 않는다 하여 인감도장 찍듯이 도장 인자(印字)를 찍어 놓았습니다.“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온갖 물(物), 심(心)의 현상을 모두 생멸 변화하여 상항(常恒)불변하는것이 아니어늘, 사람들은 이를 항상 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기 위하여 무상 하다고 말하는것입니다.“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만유의 모든 법(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가 없거늘, 사람들은 아(我)에 집착하는 그릇되 견해를 일으키므로 이를 없애기 위하여 무아(無我)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생사(生死)에 윤회하는 고통을 벗어난 이상경(理想境)인 열반적정의 진상을 말한것이며 이 삼법인(三法印)으로써 부처님 말씀과 마군의 말을 판정하는 인(印)을 삼은 것입니다.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 더 나아가 국제사회의 분쟁은 끊임없는 화택(火宅)의 문(門)을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불구덩이에 자신을 던져 버리고 있습니다.“청산첩첩미타굴(靑山疊疊彌陀窟)”푸른산 첩첩이 부처아니 계신곳이 있겠습니까?그 자리가 본전(本殿)이요 수행처(修行處)입니다.소승은 그래도 청복(淸福)이 있음인지 서울수도권에 있으면서도 청산에 머물며 온갖산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저멀리 서해(西海)에서 밀려오는 구름들을 바라보며 소싯적 초발심이 육순을 넘어서도 무한한 자연의 법칙에 모든 것이 비어버리곤 합니다.“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세상일이란 이와 같을 진데 제 잘난 맛에 산다고 남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모든 일에는 제각기 본분사(本分事)가 있는 것입니다.세상살이에 고통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산사(山寺)요사체 문지방 위에 있는 송판에 세겨 놓은 글귀 두 점이 있습니다.하나는 “오유지족(吾有之足)”을 한데 묶은 것이요, 다음은 “처렴상정(處染常淨)”입니다.자신의 본분을 안다면 그 어떤 처지에 놓여 있을지라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환경속이라 할지라도 모름지기 근본을 깨닫고 진흙탕 속에 뿌리내린 연이 꽃을 피우듯 오탁악세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마음의 고향으로 귀의하게 될것입니다.언젠가 몇 년 전 성남의 한 논밭에 연못을 만들어 놓은 곳에 한여름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홀로 그 곳에 간적이 있습니다.그런데 하늘에서는 비구름이 지나면서 후두둑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근처 초가지붕을 올린 정자에 올라 넋을 놓은 채 연꽃과 잎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자니 그 넓은 연잎에 물방울이 하나둘 모이다가 어느 정도 고이면 미련없이 쏟아내곤 하는 모습에 왜 연꽃이 불교의 상징이 되었는지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체득할수 있었습니다.“중생중생(衆生衆生)이 윤회화택문(輪廻火宅門)은 어무량세(於無量世)에 탐욕부사(貪慾不捨)니라.”일본의 유명한 선승의 족자 화폭에 담겨 있는 그림 한 점을 보았습니다.내용인즉, 한 수행자가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모아 태우는데 그 불꽃이 모두를 태우면서 한 점 낙엽이 허공으로 치솟자 불꽃도 따라 치솟으며 그 한 점의 낙엽을 소진 시키는 장면에 “천수경”의 참회진언 사구게송의 깊은 뜻을 되새겨 주었습니다.“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삼라만상이 부처 아닌 것 없고, 바람소리, 새소리 법음(法音) 아닌 것이 없습니다.“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요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금강경 사구게송이 “거짓된 자아(自我)”속의 상(相)에 집착하는 중생의 분별심을 경책하고 있습니다.“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의 무념무아(無念無我)속에 진여(眞如)가 보입니다.放 下 着瑞巖 法修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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