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保任), 자기완성 수행의 길라잡이음력 정월 보름인 2월 17일이 辛卯年 冬安居 解制日이다. 언제나, 수행납자에게 불교가 존재하는 한 변하지 않으며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結制와 解制다. 우리나라에서는 결제가 두 번 있는데 동안거와 하안거로 나누며 10월 보름부터 다음해 1월 보름까지를 冬安居라 하고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를 夏安居라 한다. 結制로는 동안거를 제일로 치며 이 두 안거를 결사한 것을 盛滿이라고 한다.결제기간이 되면 수행인은 더 한층 용맹심을 발휘하여 어느 선방이건 房付를 드리고, 수행을 철두철미하게 하며 용맹정진이라 하여 長坐不臥하고 화두의 고삐를 잡고 사생결단을 내려고 한다. 이렇게 동안거와 하안거 동안에 화두와 난투극을 벌이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을 해제라고 한다. 물론 해제를 하였다하여 화두의 고삐를 놓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때 지금까지 난투극을 벌여서 얻은 것을 큰 스님께 평점 받는 것을 보림(保任)이라 한다. 보림이란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고, 경계에 부딪쳐 유혹 당하지 않게 계속 몰아치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진리를 터득한 후 그 것을 잘 함양하여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분양선사는 “큰 바다에 파도가 고요해지면 두레박과 노를 한 순간에 놓아 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보림은 선종의 自己完成을 향한 수행의 길라잡이며 목표물의 指標라 할 수 있다.수행방법에는 사부법이 있다.첫째는, 參禪이며둘째는, 念佛이며셋째는, 看經이며넷째는, 律行이다이를 일러 四部大衆이라 한다.(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니와는 다름)선은 대부분 四部衆이 합참(合參)한다.첫째 선(禪)은 자력적 힘에 의하여 수행하여 나가며 정 자세는 발과 발을 포개고(跏趺坐)面壁看坐하는 것이나 行住坐臥言黙動靜 어느 때건 때와 장소 없이 하는 것이다. 대부분 선지식으로부터 話頭(의구)를 받아서 궁구 하는 것인데, 화두 몇 가지 예를 들면 제일 많은 수좌들이 탐구 하는 것은 무(無)자 화두다.어느 날 한 승이 있어 조주종심선사께 여쭈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狗子佛性有也)조주스님은 일언지하에 무(無)(없느니라.)라고 하였다.부처님께서는 蠢動含靈이 皆有佛性이라고 하셨는데 어찌하여 조주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無라고 하였을까? 왜? ?또 어느 승이 운문스님께 묻데어떤 것이 부처입니까?운문스님이 대답하시길 乾屎橛(휴지대신 똥을 떨어버리는 마른나무라는 뜻)이니라.성스러운 부처님에 대해서 물었는데 ‘간시 궐’ 이라니! 왜? 두 가지만 더 예시한다면한 승이 묻데 如何是 祖師西來意(무엇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조주선사 가로대 庭前栢樹子(뜰앞에 잣나무니라)니라.같은 질문에 板齒生毛(앞이빨에 곰팡이가 생긴 것)니라하는 등, 천칠백 공안이라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완전한 동문서답이다. 이러한 동문서답의 의구를 화두라 한다. 어느 큰스님은 수좌스님을 볼 적마다, 다정히 두 손을 잡으며 “진범은 잡히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화두라는 것은 思量하여서도 안 되고, 不立文字이며 言語道斷이요 心行處滅이라고 하였다. 사량을 하면 天地隔差요, 開口卽錯(입을 벌렸다하면 벌써 그르침)이라고 하였다. 참선의 궁극적 목표는 성불이며 일체중생이 구경에는 적멸에 드는 것이다. 다시 부언한다면 自他一時 成佛道를 지표로 설정하는 것이다.염불은 부처님의 상호를 상념하며 명호를 호지하고 일심 칭명하여 상대인 부처님을 의지하여 해탈의 길을 가고자하며 자기 외에 지옥고 중생을 제도하여 同入彌陀 大願海을 목적으로 하는 타력적 신앙인 것이다.간경은 혜안이 열려 삼명육통을 목적으로 하는 전반적으로 궁극의 불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다음은 율행 인데 율을 지키며 육바라밀을 닦고 십재일을 지키며 非佛之言이면 不言하고 非佛之行이면 不行하는 수행방법이다. 율을 지키는 데는 오계를 모터로 하지만 계를 지키데, 계에 기반(羈絆)되지 않으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고 自利利他 정신으로 미물, 곤충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천지가 개벽하듯 어느 날 갑자기 무명을 벗어나 涅槃寂靜에 드는 것 같은 허상에, 꼭 신들린 무당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며 피가 상현하여 곧 부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기 때문에 철저한 疑情이 있어야 한다.염불을 많이 하여 주력삼매에? 들게 되면 초인간적 작용이 나타나는데 하늘에는 오색구름이 몰려오고 천동천녀가 학을 타고 내려오고 천상의 음악소리와 五香의 향기가 裟婆에 가득하다. 이럴 땐 감상에 복받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괴성을 지르기도 하므로 철저한 신근(信根)이 있어야 한다.경을 보고 읽는 것은 배운다는 일념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진리의 알맹이를 찾으려고 일구월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혜안이 열려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볼 수 있게 되는데, 자칫 실수하면 부처도 염불도 수행도 필요 없다는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철저한 분지(憤志)가 있어야 한다.율을 수행으로 지키지 않고 율이라는 틀에 얽매여 속박되면 행동거지가 이상하며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마음에 희열을 느끼게 되면서 被動的인 상태가 되어 일방적으로 虛像에 지배되기도 하는데, 자신에 성기를 자르라는 허명에 성기절단을 하는 예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철저한 정념(靜念)이 있어야 한다.원오어록에, 구경에는 나도 부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어떠한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철저한 내면세계를 무장하고 화두와 보림으로 싸워서 승리한다면 정각은 필연이라고 하였으며. 어느 큰스님은 해제가 곧 보림 이라고도 역설 하셨다.많은 납자들이 안거 후에는 각 회상에 和尙들을 찾아 보림의 법 거량을 하고 저 불원천리 동서남북으로 雲水衲子가 되어 선지식을 찾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행의 망상 찌꺼기를 세정하고 탁수를 맑혀 내가 아닌 상대에게 수행결과에 대해서 認可를 받고 좌우 전략을 지시받아 보림하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1700공안 중 한 개를 위탁받아 탐구하고 갈고닦아 최종적으로 화두가 갈 곳이 없어 항복할 때 까지 쳐 들어가고 나서, 戰利品이 만족한 것인지를 인가 받는 것이며 다시 더 큰 전리품을 얻을 수 있는 지표 설정을 하여 주는 것이다.지난여름에 어느 사찰에 點眼 법회가 있어 갔다가 아주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법당 안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뱀과 지네가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래층 법당에 와 있는 신도가 보기 전에 내다 버리려고 원주 보살에게 불집게를 얻어 법당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뱀과 지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법당 안은 사방이 문이기 때문에 나 갈 수도 있었겠지만 불과 몇 분도 안 되어 뱀과 지네가 동시에 없어지다니 ...어디서 다시 나올 것 같아서 긴장을 하고 있는데 밖을 내다보니 아! 이게 웬일인가? 그 뱀과 지네를 신도와 같이 온 꼬마가 가지고 있지 않는가! 뱀과 지네는 장난감 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잘못보고 허둥대는 것을 장난감이라고 일러 준다면 그것이 보림이고 장난감만 보던 아이들이 진짜를 또한 오류 하여 물릴 것을 걱정하여 일러 주는 것도 보림인 것이다.금오선원에 필자가 있었을 때, 역대 선승 중에 제일이신 장 설봉(당호 鶴夢)스님을 모신 적이 있었다. 큰스님들을 많이 모셔 보았지만 설봉큰스님은 禪敎兩宗의 독특한 거두스님이셨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많은 선객들이 모여와 스님께 입실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아낌없이 전법하여 주시고 수행에 열중하는 승려들을 보면 파안미소하며 기뻐하셨다.스님께서는 국내 최초로 선문염송(祖師語錄)을 강론도 하시고 현토를 하셨는데 가끔 중생들이 불쌍하다 시며 통한의 눈물도 흘리셨고 어떤 때는 술에 고주망태가 되시기도 하셨다. 가끔 다른 큰 스님이(큰스님이 많이 계심)법문을 하게 되면 언제나 어김없이 저-끝자리에 참석하시어 경청하셨다.한번은 한국에서 S라 하는 큰스님이 49일간 연속법문을 하는 동안 설봉큰스님께서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경청하셨다. 큰스님께서 열심히 경청하시니 법문하는 S스님은 坐不安席이 되어 법문을 하였다. 이때 S스님은 삼처전심 도리를 설 하셨다.삼처전심은 부처님께서 정법안장을 가섭존자에게 유일하게 세 번 전한 것인데 일차전심은, 영산회상에서 설법할 때 사천왕이 바친 연꽃을 들고 미소를 지으신 것(拈花微笑), 이차전심은 다자 탑 앞에서 설법 중 늦게 도착한 갑섭존자에게 부처님께서 앉으신 의자의 반을 가섭존자에게 내어줌(多子塔前分半座), 삼차전심은 구시나가라 쌍수아래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께서 관 밖으로 두발을 내 보이신 것(槨示雙趺[이것도 보림이다])이다.그날도 어김없이 곡차에 고주망태가 되셨지만 변함없이 끝자리에 앉아서 법문을 들으셨다. S스님이 법문을 하고 하단하여 지대방에서 앉아 있으니 설봉스님이 술에 찌들어 가누기도 힘든 체구를 끌다시피 하여 S스님의 방문을 열었다. “아니 큰스님 어쩌자고 이리 곡차를 많이 하셨습니까?”“소승이 스님께 여쭈어 볼 말이 있습니다.”“아이고 스님 무슨 송구한 말씀을 하십니까?”S스님은 당황하여 황급히 일어나 절을 올렸다.“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일차전심만 하여도 되는 데 삼차 전심을 하였습니까?”S스님은 말문이 막혔다.설봉스님께서는 그 후 다시는 남은 법문기간 동안 법좌에 참석을 하시지 않으셨으며 S스님역시 그 후로 다시는 삼처전심 도리를 설 하지 않으셨다. 그 후 수년이 지나서 예산 향천사에서 큰스님을 시봉하고 있을 때 일이다 잔뜩 술에 취하신 큰스님께 옛날 스님께서 S스님께 질문하신 것처럼 똑 같은 질문을 하였다. “스님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일차 전심만하여도 되는데 삼차전심까지 하셨습니까?”설봉큰스님께서는 얼굴에 소름이 짝 끼치는 모습이 되시더니,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평소와 다름없이 손으로 술잔을 만들어 술이나 가져 오라는 시늉을 하셨다.그 후 스님께선 이 회상에 삼처전심을 물은 수좌는 오직 법진이 뿐이라 하시며 그때 사사받던 육조단경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술에 취하여 계시면 며칠씩 휴강을 하였다)가르쳐 주셨다.수행이 부족한 필자는 평소나 다름없이 손으로 술잔을 만들어 보여 주신 것이 진정한 보림 인줄 모르고 술에 취한 큰스님의 한 단면으로 보았을 뿐 그 속에 진정한 도리가 들어있는 것은 지금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보림(保任)이며 운전을 해도 좋다는 임시인가(臨時免許證)인 것이다. 팔만장서가 보림 아닌 것이 없으며 두두 물물이 화두 아닌 것이 없다. 體로 보면 하나의 원리지만 用으로 분별하면 萬端이 되는 것이다. 六大無碍常瑜伽 四種曼茶各不離 三密加持速疾顯 重重帝網名卽身 이 몸뚱이 다잡아 수행정진하면부처와 범부가 본래 둘이 아니며,身口意三密을 통털어 내세우면삼라만상 모두를 부처라 부르네. 咄법진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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