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복잡다단한 현대를 살다보면 조금도 쉴 틈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중이라도 염불하시면 됩니다. 염불(念佛)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인데, ‘부처’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무한 생명’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한 생명’이 나 자신 가운데 있음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 방법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그런 과정 속에서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이 나 자신 속에 갈무리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나와 대립하고 있는 남이 없고, 나를 해칠 적(敵)이 없고, 아무런 장애적 요소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 시간을 단 30분이라도 갖도록 하십시오.그런 연후에 만나는 사람들은 이미 남이 아닙니다. 본래 그 사람과 내가 한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다툼이 아닌 사랑 밖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닌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바로 나라는 점을 아는 것이 지혜인데, 하나인 까닭에 그를 이롭게 하는 사랑 밖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진정한 자비는 실제로 우리가 지혜의 눈을 떴을 때 행해지는 것이지만,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비록 지혜의 눈을 확실히 뜨지 못했더라도 뜬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비행이라고도 하겠습니다.염불을 바쁜 와중에 틈틈이 하면서 육바라밀을 수행해야 합니다. 첫째, 보시바라밀입니다. 겉으로는 남으로 여기는 관념이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다손 치더라도, 본래는 그것이 아닌 까닭에 대립이 없는 자비행, 구체적으로는 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생명을 그만큼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있는 상대적 울타리를 허물어 버리는 때문입니다. 둘째, 5계를 지키는 지계바라밀입니다. 나는 본래 무한 청정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무한 생명’인 까닭에, 나 이외의 다른 생명을 남의 생명이라고 보고 죽일 수도 없는 것이고, 나 아닌 남의 재산이라고 훔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삿된 음행을 할 수도 없고, 거짓말 · 꾸민말 · 이간질 · 험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진리를 어둡게 하는 술에 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별안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명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내면서 혹시라도 내 마음 속에 상대적인 관념(가장 두드러진 것이 명예욕과 이기심)을 부수어야 하는데, 그것이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벅찹니다.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나에게 쓸데없이 욕을 해오거나, 어려운 환경을 만들거나, 혹은 계산상으로는 당연히 주어야 할 이익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입니다.그 사람들은 나의 명예욕과 이기주의를 부숴 주는 ‘부처님의 조교(助敎)’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에게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인욕바라밀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길에서 누구와 다투더라도, 그 과정이 지옥이 아니라 거기에 바로 나의 수행도량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을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하는 것이 정진이 아니라, 365일 계속해서 어느곳에서나 수행하는 것이 정진바라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시 · 지계 · 인욕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끊임없는 정진 속에서는 내 마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고 · 락 · 이 · 쇠 · 칭 · 기 · 훼 · 예(苦樂利衰稱譏毁譽)의 여덟 가지 바람 때문인데, 그 바람은 이미 나와 관계가 없으니까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정바라밀입니다.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호수가 맑으면 달이 그대로 비치듯이 진리가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 바라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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