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의 본질은 한호흡 한호흡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는 시작점으로서 호흡은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호흡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은 몸에 대해서 주의 깊게 깨어있어서 몸을 통해 일어나는 감각과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몸의 감각에 따라 조건적으로 일어나는 정신현상들에 민감하게 깨어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호흡사이에서도 많은 정신과 물질의 과정들이 발생했다가 사라져 간다. 이러한 생멸인연의 과정들을 관찰함으로써 고통의 발생과 소멸의 길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호흡을 주시하라고 가르쳤다" 


<원문>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  數日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 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 呼吸間
佛言  善哉  子知道矣


<해석>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 목숨이 얼마간에 달렸느냐?”
한 사문이 ‘며칠간’이라 답했다.
부처님께서는 “너는 아직 도를 모른다”하시며 다른 사문에게 똑같이 물으셨다.
한 사문이 “밥 먹는 사이”라고 답하자 부처님께서 “너도 아직 도를 모른다”하시고 다른 사문께 다시 물으셨다.
한 사문이 “호흡 지간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알았구나” 하였다.

인간의 생명이란 호흡을 통해서 유지된다. 호흡이 끊어졌다라는 말은 생명이 다했다라는 말이다. 호흡은 생명활동이자 몸과 의식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이다. 그래서 도가(道家)에서나 요가수행자들은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흡을 이용하여 정기(精氣)를 길러낸다.

인간 존재가 살아 있다라는 말은 숨을 쉬고 있다라는 말과 같다. 그만큼 숨은 생명 유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도(道)가 호흡사이에 있다’라는 말은 순간순간을 주의 깊게 깨어 있어서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아감을 말한다.

불방일(不放逸)이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호흡의 사이일지라도 결코 느슨하게 놓치지 않는 경각심을 가지고서 수행에 임한다는 의미 일 것이다.
초기불교의 수행에서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아나파나사티(수식관)나 <대염처경>의 수행의 주제는 첫 번째로 호흡을 꼽고 있다.

호흡은 사마타(마음집중처)의 영역으로 수행을 하든 위빠사나(관찰)의 영역으로 수행을 하든 모두가 인간의 정신을 돕는 유익한 수행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은 “인간의 삶을 유익하게 하고 마침내는 해탈에 이르게 해준다”라고 설한 것이다.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활동을 경험자이자 관찰자로서 지켜보는 힘을 갖게 한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다양하게 분류해 놓았다.

5온으로 12처로 18계로 분류를 해 놓았는데 이러한 분석과 분류는 자아란 여러 가지 요소들(담마, dhamma)의 결합이란 것, 즉 끊임없는 생명 연속의 과정 속에서 인연취합이 이루어내는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변화의 과정을 인간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는 자아라거나, 영혼이라거나 하는 그 어떤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인간의 번뇌는 고정불변의 내가 있다라는 고정된 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을 버리고서 순수하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을 한다.

이런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는 시작점으로서 호흡은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호흡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은 몸에 대해서 주의 깊게 깨어있어서 몸을 통해 일어나는 감각과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몸의 감각에 따라 조건적으로 일어나는 정신현상들에 민감하게 깨어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호흡사이에서도 많은 정신과 물질의 과정들이 발생했다가 사라져 간다.
이러한 생멸인연의 과정들을 관찰함으로써 고통의 발생과 소멸의 길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호흡을 주시하라고 가르쳤으며, 호흡을 관찰하면서 감각(受)과 지각(想)과 의지적 정신현상들(行)과 의식의 변화들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의 본성이 무상하고 늘 생멸하는 그 자체가 고통이며 그 자체의 자성이 없음을 즉 무아임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삼법인을 깨달아 앎으로써 존재를 이루는 최소 단위들인 담마들에 갈애와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적인 현상이 가진 허망하고, 물거품같고, 아침이슬, 꿈, 신기루, 파초, 그림자, 번개불 같음을 안다면 현상에 대한 염리(厭離, 싫어하여 떠남)의 마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이러한 마음은 출세간의 도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현상의 본질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예민하게 깨어있으면서 한 호흡 한 호흡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한다는 것은 도(道)의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원문>
佛言하사대  學佛道者는  佛所言說 
皆應信順 이라
譬如食蜜이면  中邊皆甛하여  吾經亦爾 이다.


<해석>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도를 배우는 이는 내가 말한 법을 모두 잘 믿고 따라야 하며, 이는 꿀을 먹는 것과 같아서 중간에도 끝에도 다 맛이 달듯이 내가 설한 법도 또한 그러하다.


성문(聲門)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육성으로 직접 듣고 깨달은 분들을 말한다.
보통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의 순서로 말하고 성문과 연각들을 소승이라고 폄하하여 말하는데 사실은 성문과 연각도 성자의 반열에 속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소승이 있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에 대·소승이 있다.

우리가 대승불교도라 말하지만 자기 자신만이 깨달으려고 한다면 이러한 자세가 곧 소승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법의 실상이 본래 텅 비워져 깨달아야 할 나도 없고 제도할 대상도 공(空)함을 알면서 닦아간다면 닦아도 닦음이 없이 닦을 것이며 중생을 제도했다 하더라도 그 어떤 중생도 제도할 중생이 없다는 <금강경>의 가르침과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을 고집하며 깨달아야 할 내가 있고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아직은 분별심이 덜 떨어진 소승적인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런 말 자체가 쉽게 받아들이고 수용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승의 근기는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베푼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소승법이라 말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에도 이런 내용들이 녹아져 있다.

대승불교가 갑자기 출현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그 시대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불교도들이 그 역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려는 노력의 결실이 대승불교이다.

만일 대승불교가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과 무관하다면 그것은 불교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대적 요구에 의해서 변화가 필요 할 때에 불교도들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서 변화를 모색했다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들은 모두가 한맛(一味)이라고 하는 것이다. 꿀이 처음도 달고 중간도 달고 끝도 달듯이 또는 오대양(五大洋)이 모두가 짠맛 하나이듯이 흐름의 연결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면서 “나에게는 숨겨 둔 가르침이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 입멸에 들어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는 묻고 싶어도 물어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였다. 경전을 읽다 보면 이런 부처님의 모습이 가슴 깊숙하게 절절이 느껴진다.
부처님께서는 평소에도 힘이 들면 자신의 신뢰할만한 제자들에게 법문을 이어서 하도록 맡겼었다. 이것은 중생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다.
또한 “나의 가르침은 법(法)과 율(律)로서 잘 가르쳐져 있으니 그것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아서 잘 믿고 따르라”고 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숨김없이 설해져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이렇게 잘 가르치고 펼쳐 놓은 다르마(法)를 믿고, 공부하고, 따르며,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실천 수행해 나가는 일만 남아 있다 할 것이다

<원문>
佛言하사대  沙門行道이면  無如磨牛이라
身雖行道  心道不行이면,  心道若行 
何用行道가


<해석>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문이 팔정도를 따름에 있어 저 맷돌 돌리는 소와 같아서는 안된다. 몸은 비록 도를 행하나 마음이 도를 따르지 않으니, 마음이 도를 행할 것 같으면 어찌 다른 도가 필요하겠는가

부처님은 도를 깨닫기 전에 고행자의 숲인 우루벨라에서 6년 동안 뼈를 깎아 내는 듯한 고행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고행을 하다 죽어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지 않은가?’
6년 동안의 뼈저린 수행이 마치 맷돌을 가는 소와 같이 몸만 괴롭힐 뿐 진리와 삶의 의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고행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네란자라강에서 목욕을 하고 수자타가 올린 우유죽을 드신 다음에 보리수 아래 앉아서 고요히 내면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였다.

우리는 흔히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는 말을 쓴다. 죄업을 씻어내기 위해서 몸을 괴롭히는 고행주의는 부처님 당시에 성행했던 수행법이며 현재의 우리 삶에서도 이런 모습은 종종 발견 된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라는 근본은 무시된 채 몸만을 괴롭히는 방법상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에 대한 수행 또한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몸과 마음은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몸도 중요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게 마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조도일 선사가 젊은 시절에 남악회양 선사의 문하에서 열심히 정진할 때 마조 선사가 좌선하고 있는 그 앞에서 남악 선사가 벽돌을 갈았다.

마조가 왜 벽돌을 가느냐고 묻자 남악이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마조가 어떻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되겠느냐고 묻자 남악이 되받아쳐서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어떻게 좌선하여 부처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마조가 “그러면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남악은 “만약에 소가 수레를 끌 때에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느냐, 소를 때려야 하겠느냐”고 대답했다.
이와 같이 수행에서는 수행의 근본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영가현각 선사의 ‘지엽적인 것은 내가 능숙하지 못하고 부처님께서 인정한 근본적인 것만을 잘 이해하고 있다’라는 증도가의 구절도 있는 것이다.

강령(綱領)이란 어떤 것의 근본을 말한다. 강(鋼)은 그물의 중심에 있어 잡아끄는 역할을 한다. 강만 잡아당긴다면 그물의 전체가 끌려오는 이치다. 그래서 모든 일은 그 근본이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바로 그 근본이 되며, <팔만대장경>은 이 마음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말할 때 마음의 과학이라고 한다. 또는 심리학적인 경향이 강한 종교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모든 것은 인연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 하나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태고총림 선암사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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