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진 당산나무 꼭대기에
외딴집 한 채 걸려 있다
무엇으로 동여맸는지
아무리 바람 불어도 끄떡없다
대들보 같은
아버지의 삶 같다
고독 같다
저 안에 누가 살고 있는지
종언(終焉) 같다
과거는 왜 쓴가
과거에는 왜 쓴맛이 더 많은가
과거를 생각하면 왜 쓴맛들이 먼저
떠오르는가
까치집 같은 삶
텅 빈 흉가의 삶
잎 진 당산나무 꼭대기에
외딴집 한 채 걸려 있다
고향집 한 채 걸려 있다
종말처럼 걸려 있다

고향을 떠난 지도 어언 40년이 넘었다. 아무리 떠나도 고향은 고향이다. 고향은 왜 지워지지 않는 걸까. 유년의 아픔은 왜 내 기억의 상처를 자꾸 덧내는 것일까.

동구 밖에 몇 백 년 묵은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다. 그곳에 자주 올라가 놀았다. 어린 몸으로 그 아름드리 당산나무를 어떻게 올라갔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런데 그 아름드리 당산나무에 올라가면 커다란 줄기와 줄기 사이에 앉기 좋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에 앉아 있으면 퍽 좋았다. 어머니의, 아니 당신의 품처럼 좋았다.

가을이 되면 당산나무는 잎을 다 떨구었다. 잎 진 그 당산나무 꼭대기에는 꼭 까치집 한 채가 걸려 있었다. 외딴집 한 채가 걸려 있었다. 우리 집 같았다. 학교 갔다 돌아와도 아무도 없는, 놀 친구도 없는, 닭과 돼지와 오리만 있는.

대처로 나와 살면서 외로울 때가 많았다. 그러면 늘 그 당산나무 외딴집이 생각났다. 지금은 모두 떠나 폐가가 된 고향집 같은 외딴집. 아버지의 땀 냄새와 어머니의 살 냄새가 그리울 때면 나는 고향집과 함께 그 외딴집을 찾아간다.

유소년 시절, 나는 무던히도 어머니 아버지 속을 썩였다. 그것이 병 때문인 줄 커서야 알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도 그것이 병 때문인 줄 전혀 몰랐다. 그러다보니 내 유소년 시절은 상처와 아픔 투성이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시절의 아픔과 상처는 머리가 반백이 넘어서도 지워지질 않았다. 나도 몰래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 속에는 늘 그 아픔과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은 썼다. 쓰디쓴 그 과거에서 도망치고 싶어 별의별 짓을 다해 보았다. 명상, 심리치료, 상담, 연애, 폭음, 수행, 여행, 방랑……등등, 그래도 쓰디쓴 그 번뇌는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쓰디쓴 그 과거를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관음(觀音)처럼 나타난 그녀에게. 그녀는 정말 관음처럼 내 말에 귀 기울여줬다. 그리고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눈과 손으로 때로는 포근하게, 때로는 질책으로, 때로는 약으로 나의 아픈 상처와 쓰디쓴 번뇌를 안아 주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외딴집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 외딴집과 함께 내 안에서 논다. 쓰디쓴 과거와 친구로 지낸다. 내가 거부한다고 해서 그 아픔과 상처들이 떠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를 이만큼이나 키워준 그 아픔과 상처들에게 감사한다. 행복은 그 자리에 꽃피어 있다.

-시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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