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10-26 14:30 (월)
   |   
불기 2564(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김광수 작가의 청풍명월】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
【김광수 작가의 청풍명월】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
  • 김광수
  • 승인 2020.07.20 16: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색수상행식 오온은 생명의 전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상(相)이자 용(用)이므로 생명과 유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지수화풍 사대의 색(色, 육체)이 있어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수상행식은 우리의 정신작용을 풍성하게 하고, 다양하게 하며, 정보를 기억하여 창조적 네트워크를 공유·구성하게 한다.

 

나무가 광합성과 양분 흡수 기능이 있어 개화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탐진치 삼독도 생명체가 생명 활동을 하는 데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탐진치는 문명을 진화시키고, 불공평한 세계를 정의롭게 하며, 지혜를 추구하게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탐진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개체의 욕망에 올인 되었을 때이다.

우리의 세포에 게놈지도같이 원형(原型)으로 새겨진 그러한 법칙을 버리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잘 쓰고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절집에서 흔히 드는 비유로 바다가 바람이라는 인과법칙을 만나, 파도를 일으킨다고 해서 파도가 바다가 아닌 것은 아니다. 파도를 버려야 바다를 얻는다는 것은 희론이다. 파도를 떠나서는 바다를 얻을 수가 없다. 오온이나 삼독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자주 인용되는 화엄경의 한 대목처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전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그림 그리는 화공과 같아서 부처를 그려내면 보리심이고, 중생을 그려내면 중생심이다. 장미꽃이나 들꽃이나 꽃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부처나 중생이나 본래의 청정한 자리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마음이 만들어 낸 통증은 마음을 치료하

면 사라지듯이 중생심을 치료하면 곧 보리심이다. 보리심이나 중생심은 마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돛단배이다. 선도 악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선을 지향해야 하는 것처럼 보리심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섭리이고 보살도의 정신이다.

주관도 객관도 마음 바다의 물거품이다. 견색(見色)은 견심(見心)이다. 보고 듣는 것은 곧 마음을 보고 듣고 듣는 것이다. 꿈속의 삼라만상 천변만화의 현상들이 한 덩어리의 꿈인 것이므로 꿈속에서의 이분법과 갈등은 꿈이 깨면 다 한 꿈속의 일에 불과하다. 중생을 떠나면 불성도 마음도 없다. 중생은 불성으로 가는 길이고 색수상행식과 탐진치는 그 길을 여는 열쇠이다.

-소설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