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금강경 법회의 시작

인도 마갈타국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동산을 수달장자(Sudatta : 須達長者, 給孤獨長者)가 석가에게 보시한데서 비롯된 기원정사 승원(僧園)의 설화는 참으로 신심이 난다. 지금의 인도 북부 우타르 프라데시 주 북쪽, 사위성지(舍衛城址, 마헤트 [Maheth]) 남문밖의 사헤트(Saheth) 숲을 덮을 정도의 금을 깔고서야 받았다는 이 정사는 마가다국에서 빈비사라의 보호를 받은 죽림정사와 함께 2대 정사로, 우리가 아는 석가세존의 설법 대부분이 바로 이 기원정사에서 행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부처님은 기원정사에 정말 많이 계셨는데 왜 ‘한때’라고 한 것일까? 부처님의 생몰연대가 부정확한 까닭에 금강경의 가르침을 베푼 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때가 다시 안오는 딱 한번 있었던 금강경 법회라는 의미로 일시라고 한 것은 아닐까? 모든 경전도 마찬가지로 다시 만나기 어려운 희유한 법회라는 의미를 우리가 이 금강경을 읽을 때도 똑같이 필요하다. 수만 번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번을 정말 간절하게 힘이 닿는 데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노력해서 다시 만날 수 없는 불법의 가치를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이 없이 읽는다면 수만 번을 암송해도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번 만나기도 어려운 희유(稀有)한 부처님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거룩한 가르침[經 또는 經典]을 펼 때 1250명이나 되는 수많은 대중들과 함께 하셨다. 그 기원정사가 넓다고 해도 적어도 500평이 넘는 곳에 밀집해 앉고 에워싸며 모여 있었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 외에 이 거룩하고 희유한 가르침을 듣고자 모든 부처와 보살들, 나아가 아수라, 천인들까지 모습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법회 자리[회상(會上)]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어떻게 모두에게 전달되었을까? 마이크나 스피커가 없던 시절에 석가세존께서는 끊임없이 사자후를 하신 걸까? 분명 가능하겠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소통의 방법 또한 있었을 것이다.

1970년 전성기를 구가했던 주빈메타는 플라시도 도밍고 등과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공연 <일 트로바토레> 음유시인을 지휘한다. 이 가운데 나오는 집시의 합창 이른바 "대장간의 합창"에 나오는 우렁찬 노래소리들을 들어봤는가! 비제의 카르멘의 6명의 수행원들을 각각 앞세운 투우사가 입장 행진하는 장면의 합창도 비슷할 것 같다. 한 두명의 성악가가 노래를 하고 같은 노래를 따라서 합창하는 울림의 장면을 본 것 같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불보살과 대중들이 함께 한 이 금강경 회상에서 대중들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여 모두들 한참 긴장해서 귀를 쫑끗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중들이 제대로 다 듣기 위해서 모두 부처님의 한마디 아니 한 문장 씩을 듣고 또 말하면서 함께 합창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들 함께 들을 수 있었고 들었다고 하겠는가?

모두 성취해서 신통력으로 이심전심했다고 해도 믿겠지만, 현실적으로 노래로 합창해서 서로들에게 한마음으로 전한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우렁찬 소리를 들으며 합창하며 그렇게 암송해 나간 것이 바로 여시아문이 전하는 경전의 내용이라고 하면 더 신심이 깊어질 것 같다. 불경 가운데 시 나아가 노래와 같은 운문체가 많은 것도 그런 영향은 아니었을까?

전편에 게재한 사진은 화정박물관 소장 티베트 탕카 '라마최빠 촉싱'(115×75㎝) : 촉싱(Tshog shing)은 법맥의 스승과 본존들을 모임의 나무형태로 만든 탕카로 집회수(集會樹)나 귀의수(歸依樹)라고 한다. 아울러, 이번 호에 실은 사진은 금어 도현의 오백나한도로 현재 제주 약천사에서 전시중이다. 부처님의 금강경 법회는 아니지만 불보살과 대중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금강경법회에 대해서 ‘합창’과 같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전후좌우 그리고 하늘 위로 꽉 채운 수많은 대중 가운데 부처님의 사자후가 울리고 모두가 합창 암송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딱 한번만의 정말 희유한 법회가 이제 막을 열렸다. 이런 울림으로 당시의 법회를 관하며 금강경을 읽어가는 것이 바른 독법일 것같다.
전편에 게재한 사진은 화정박물관 소장 티베트 탕카 '라마최빠 촉싱'(115×75㎝) : 촉싱(Tshog shing)은 법맥의 스승과 본존들을 모임의 나무형태로 만든 탕카로 집회수(集會樹)나 귀의수(歸依樹)라고 한다. 아울러, 이번 호에 실은 사진은 금어 도현의 오백나한도로 현재 제주 약천사에서 전시중이다. 부처님의 금강경 법회는 아니지만 불보살과 대중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금강경법회에 대해서 ‘합창’과 같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전후좌우 그리고 하늘 위로 꽉 채운 수많은 대중 가운데 부처님의 사자후가 울리고 모두가 합창 암송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딱 한번만의 정말 희유한 법회가 이제 막을 열렸다. 이런 울림으로 당시의 법회를 관하며 금강경을 읽어가는 것이 바른 독법일 것같다.

 

003 爾時世尊食時 着依持鉢 入舍衛大城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시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이때 세존께서 공양 시간이 다가오자 옷을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음식을 구걸[탁발(托鉢)]하기 위해 사위대성으로 들어가셨다. 성 안에서 차례대로 구걸을 마친 뒤에 본래 계시던 처소로 돌아오셨다. 식사를 마치신 후에 가사와 발우를 정리하신 뒤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일상이란 무엇인가? 늘 생활하는 곳은 수행의 공간이 아닐까? 수행 따로 일상 따로라는 것이 과연 불교적 사고에 맞는 것일까? 이건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도 중요하지만 일상도 그에 못지않은 수행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생활선(生活禪)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롯하게 깨어 있는 일상 자체가 바로 수행과 다르지 않다. 그런 불이론(不二論)이 불교적인 생활관의 한 축이 아닐까 싶다. 까닭에 금강경 법회의 시작은 늘 일상 즉 걸식이라는 청빈한 생활과 솔선수범하는 ‘하심’을 배우는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고 부터는 우리기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듯이 B.C.(Befer corona)와 A.C.(after corona) 즉 코로나전과 코로나후의 세계로 시기구분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는 코로나의 프롤로그(서막)인 코로나0년에 해당하고 2020년이 어쩌면 코로나 19의 1년이 되는 것은 너무 과한 표현일까? 인류에게 광범위하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건을 중심으로 앞시기와 뒷시기를 나누는 시대구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금강경도 그와 다르지 않다. 대승 특히 공의 실체를 다루는 금강경의 회상이 열리는 이 날 이후와 그 전은 대중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부좌이좌는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법회시작은 속에서 성으로, 일상에서 회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불보살이 현현하는 회상으로 갑자기 참선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를 둘러싼 모든 분위기 변하며, 파동이나 파장도 다르게 된다. 모두가 일시에 보살이 되는 순간이 된다. 그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성성적적은 물론 여여하지 못하므로 다들 제자리로 돌아온다. 도로아미타불인가? 참선하는 이들은 늘 부좌이좌의 그 순간처럼 늘 정진해야 할 따름이다. 까닭에 참선 수행을 하는 눈푸른 사람들은 ‘부좌이좌’를 화두로 여기는[참구(參究)] 경우도 적지 않나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금강경을 읽기전에 다음의 개경게와 개법장진언을 염송하며 나만의 아니 어쩌면 불보살이 함께 하는 거룩하고 희유한 금강경 법회를 여는 것은 어떨까?

개경게(開經偈)

무상심심미묘법 無上甚深微妙法 위 없이 매우 깊은 미묘한 법

백천만겁난조우 百千萬劫難遭隅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워라

아금문견득수지 我今聞見得修持 내가 지금 듣고 보아 닦고 지니어

원해여래진실의 願解如來眞實義 여래의 참된 뜻을 알고자 합니다.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옴 아라남 아라다(3번)

-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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