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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5(2021)년 01월 17일 일요일
【화엄종주 경운 원기 대선사의 생애와 사상】6.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서 敎正으로 추대돼
【화엄종주 경운 원기 대선사의 생애와 사상】6.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서 敎正으로 추대돼
  • 오경후
  • 승인 2020.06.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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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불교의 태동과 경운 원기②

수행전통 계승하여 선교·염불·계율을 수행의 덕목으로 삼아
근대불교의 주체적 성립을 위한 기회라면 적극적으로 참여

신해년(辛亥年 1911) 1월 15일에 또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었다. 이 총회에 온 사람들은 곧 전라남도와 지리산 일대의 스님 무리였다. 이때 송광사에 임제종 임시종무원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관장을 투표로 선거하였다. 선암사의 김경운과 백양사의 김환응이 모두 덕망이 높아 동수(同數)의 표를 얻었다. 여러 번 선거를 해도 모두 같아서 끝내 별도로 선거하는 방법을 정하여 경운법사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경운법사는 연세가 많고 힘이 쇠잔해진 까닭에 나오지 못하고, 한용운에게 권한을 대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광주부 내에 임제종 포교당을 설립하였다. <이능화, 「범어일방임제종지」, 『조선불교통사』>

경운 원기 선사가 순금으로 사경한 묘법연화경(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경운 원기 선사가 순금으로 사경한 묘법연화경(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인용문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에 예속되는 조동종맹약에 반대하여 임제종을 설립하는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경운은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중흥을 위한 참여뿐만 아니라 민족불교의 회복을 위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경운은 제자 금봉 병연과 함께 임제종 임시종무원을 범어사로 이전하고, 임제종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그러나 경운은 나이 59세의 쇠잔한 몸으로 적극적인 참여가 어려워 한용운을 관장대리로 임명하였다. 이후 불교계는 원종과 임제종이 철폐되고, 조선선교양종이 설립되고 각황사를 중앙포교당으로 삼았다. 1914년에는 불교진흥을 목적으로 불교진흥회가 발족되었다. 불교진흥회는 “불교를 진흥시키기 위해서 전국 30본산의 본말사에서 불교전문과를 졸업한 우수한 30세 이상의 승려를 선발하여 불교진흥회에서 운영하는 포교사 양성소로 보낼 것”을 시행세칙에 명시하고 있었다. 경운은 1915년부터 7년 동안을 각황사 포교사로 활동하였다. ‘강학과 포교’가 당시 한국 불교계가 직면한 문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교중흥을 위해서는 인재양성과 교세의 활성화는 중요한 과제였다. 각황사는 환영회까지 조직하여 ‘생불(生佛)’을 모셨다고 한다. 그는 매주 일요일 11시 경 각황사에서 설법했는데, 특히 1915년 4월 18일 법회 때는 30본산 연합회의소위원장인 강대련을 비롯하여 실업가 70여 명이 참석하여 설법 이후에 불문에 입교하는 입교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경운은 1929년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추대 되었다. 당시 불교계는 분산된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통일기관의 설립이 대두되고 있었다. 예컨대 승려대회를 준비했던 세력들은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교육·포교·승단의 기강 등 현안 사안을 쇄신하고, 신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을 확립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는 식민지 치하에서 자주적으로 종헌과 입법부 및 집행부를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이 대회의 의미는 불교계가 식민지 지배에 예속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발전을 지향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이 경운은 격변하는 한국근대불교사에서 전통불교의 계승과 근대불교의 주체적 성립을 위한 기회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 경운 원기는 선암사 대승암에서 85세로 입적했다.

Ⅲ. 삼문(三門)의 계승

경운 원기의 진영(眞影)은 ‘화엄종주경운원기대선사(華嚴宗主擎雲元奇大禪師)’라 했고, 추사(秋史)가 쓴 백파의 비는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하였다. 선과 교, 율을 모두 포섭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른바 선교겸수와 염불을 의미하는 삼문(三門)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불교 중흥의 근간으로 삼은 수행의 대강이다. 경운 원기는 이와 같은 수행전통을 계승하여 선교·염불·계율을 수행의 덕목으로 삼았다.

경붕 스님에게도 제자가 있었으니 경운 원기이다. 일찍이 일행선사가 말하기를, “골짜기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내가 도를 전해 줄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道詵 스님이 홀연히 와서 그의 術法을 다 배워가지고 가게 되자 일행 스님이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는 구나.”라고 하였던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범해 각안, 「함명강백전」,『동사열전』권5>

인용문은 선과 화엄, 계율에 정통했던 조선후기 선암사의 백파 긍선과 그의 법을 계승한 침명 한성→함명 태선→경붕 익운으로 이어지는 수행전통의 물줄기가 경운에 와서야 바다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선암사는 조선후기 ‘교학의 연총(淵叢)’으로 팔도의 승려가 다투어 방망이를 맞으러 올 만큼 조선의 ‘나란다’였다. 경운은 17·8세기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던 불교계가 왕조 말기를 거듭할수록 그 침체가 심각해지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도선과 비유될 정도로 선학의 사상과 수행을 집대성하여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경운의 사상과 수행을 알려주는 흔적 가운데 알려져 있는 문헌은 『사문일과(沙門日課)』가 유일하다. 이 책은 수행자가 일과로 외우는 불경이다. 전체 6권 1책으로, 세부구성은 권1 지장경, 권2 행원품, 권3 찬불게, 권4 미타경, 권5 발원문 권6 찬관음문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책은 청대 안락와(安樂窩) 사문이 찬한 『안락와사문일과경』을 경운이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사문일과경』은 아미타정토신앙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내용면으로 아미타신앙 외에 대승보살계 및 관음신앙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여러 진언 및 불· 보살 등에 대한 보소청문,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을 중심으로 한 대승보살계에 대한 것으로 「예화엄경발원문」·「보현보살찬불게」, 「서방대도사아미타불십념왕생원」 『불설아미타경』, 그리고 관음신앙과 염불신앙의 주요대상인 「찬관음문」·「대혜종고선사예관음문」·「기도 관음문」·「재가송경회향」·「마불변」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면에 의하면 화엄종주 월저 도안(1638~1715)이 발심하여 간역을 담당했다. 구성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경운 역시 월저의 법손으로 일찍부터 이 책을 수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경운이 편집한 『사문일과』의 권1 『지장경』은 『사문일과경』에는 누락되어 있는 경전이다. 경운은 『사문일과경』을 임의대로 편집하여 수행자의 일과로 독송했을 것이다.

상법과 말법의 시대에 불법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지만, 어찌 물듦과 깨끗함에 분별이 있겠는가. 서울 사는 스님들이 멋부리고 치장하고 놀았지만, 대사는 중생교화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수시로 방에 출현하는 자벌레 조차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정인보, 「화엄종주경운당대사비」, 『산고집』> 첩

정인보는 경운이 어떤 허물도 없이 지냈는데 지계가 청정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그를 친견했던 후학들은 곧 계를 듣는 듯이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하였다. 경운은 일찍이 스승인 경붕 익운의 친형이기도 한 화산 오선(華山晤善)에게 구족계를 수지했는데, 구족계는 평생 수행의 지남이 되었다. 특히 1907년부터 1911년까지 5년 동안 명맥이 끊어진 선암사의 계단을 재수(再修)하고 계율을 진작하기도 하였다. 1919년 경운의 참회계첩에 서문을 쓴 권중현(權重顯)은 중생의 사표가 될 만 한 사람이 몇 되지 않았던 당시 경운은 “현세의 아라한이시고 육신 보살이시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계의 공공연한 평판이지 내가 사사롭게 함부로 찬탄하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경운의 석장(錫杖)이 이르는 곳마다 법문을 듣고자 한 이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수계를 받고 명단에 기록으로 남기는 자가 무릇 만 명에 다다른 다고 한 것이다. 선암사를 찾았던 최남선은 경운의 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남의 눈을 위하여 율기(律己)하는 이가 많은 세상에 그는 진실로 자기의 마음을 위하여 섭신(攝身)하는 드문 어르신이다. 얽매여서 하는 지계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정행이다. 히히히 하고 식식식하여 풀솜 같은 그의 속에는 50여 년 굳히고 뭉글린 금강불괴의 알맹이가 들어있다. 이것이 상인(常人)이 하기 어려운 것, 실상 우리가 노사를 보는 까닭이며, 또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누구라도 필경 사를 만만하게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최남선, 『심춘순례』,백운사>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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